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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바슐라르가 꿈꾼 상상력의 힘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분석

by 오로지오롯이


들어가며


바슐라르는 과학 철학자라 불린다. 과학은 존재를 다루고 철학은 사고를 다룬다고 하지만, 바슐라르에게 철학은 과학을 포함하기도 했다. 과학은 철학적 담론을 대상으로 하지 않지만 철학은 과학적 담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바슐라르가 연구했던 과학철학이다. 그 대표적인 저서가 물과 꿈, 불과 꿈인데, 필자가 알아보고자 한 것은 바로 ‘물과 꿈’이다. 바슐라르 저서 중 이 책에 주목한 것은 일단, 물질적 상상력이 불의 심상과는 전혀 다른 심리를 부여한다고 판단했고, 그 다른 심리 안에서 상상하게 하는 요소로 물이 지닌 순수성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은 물질 중에서 가장 순수한 실체라는 바슐라르의 말을 주목하면서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물과 꿈> 분석


바슐라르는 ‘물과 꿈’을 통해 물의 심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즉 인간의 상상력이 지니는 물질성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또한 물의 심상이 관여하는 상상을 매개로 하여 죽음을 극복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꿈꾸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힘이며, 단순하고, 심지어 어떤 고정된 형태조차도 지니지 않는다. 물은 가장 기본적인 물질의 실체이기에 물은 그 표면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존재자들을 받아들인다. 또한 수면으로부터 깊이 내려가 수심에 다다르면 죽음의 우울을, 그 수심이 가득한 인간 존재의 운명을 보게 된다. 수면의 화려함은 수심의 단조로운 어둠으로 인해 가능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물을 통해서 탈바꿈할 수 있다. 그 탈바꿈이란 상상을 통해 물질이 지니는 근본적인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1장의 수식어들은 ‘맑은’, ‘봄의’, ‘흐르는’이며, 2장의 수식어들은 ‘깊은’, ‘잠잠한’, ‘죽은’이다. 이렇듯 바슐라르는 맑지만 흐르고 있는 물의 불확실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수면에 잠겨 있는 죽음의 심상을 보여준다. 물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물은 빛을 거부하여 그림자들을 흡수하는 심상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의 물과 죽음의 물이라는 양가성은 우리의 상상을 표면에서의 삶에서부터 출발하여 어느 순간 깊은 곳의 죽음에로 인도한다. 우리들의 삶이 지니는 이중성을 드러내면서 물질적 상상력에 매우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의 일련의 순환 과정은 바로 물의 역동적 상상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바슐라르는 물의 심상이 ‘형상’과 ‘물질’ 그리고 그것의 종합인 인간 실존에 관여한다고 보았다. 바슐라르의 표현대로 물의 표면과 심연은 그 사이의 순환 안에서 진정한 자신의 물질적 상상력이 지니는 의미를 회복된다. 형상과 물질, 이런 다른 질적 아름다움이 함께할 때에만 우리의 심상을 울리고, 우리를 상상하게 하여, 우리의 심리적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바슐라르는 우리의 삶을 표면에서 심연에 이르기까지 그 물이라는 하나의 심상을 통해 완성된 그림으로 그려내 보고자 한 것이 아닐까.


또한 바슐라르는 물과 거울을 비교하면서 물의 심상을 증폭시키려 했다. 즉 물의 거울은 깊이를 지니므로 입체적이지만. 물의 영상은 거울처럼 선명하지 않고 어느 정도 흐릿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아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도 ‘자신’의 악수도 받을 줄 모르는 ‘자신’이다. 그래서 ‘자신’은 실제의 자아와 비춰진 자아를 인식했음에도 결국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거울의 나르시시즘은 소통을 포기하여 결국 상상력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해버린다. 하지만 물의 거울은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지워진 자신의 모습을 완성해 나가면서 상상력의 세계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의 거울은 물에 비친 그림자를 약간 흐리게 하고 그 색깔을 바래게 한다. 또한 실제의 모습에서 많은 세부들을 지워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상상력은 그 지워 없어진 세부 대신에 스스로 그리는 즉 상상하는 것을 보려 한다. 즉 물의 거울은 열린 상상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화를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욕망이 설화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했다. 이처럼 바슐라르는 그러한 신화들, 특히 물과 관련된 신화를 살펴보면 물이 어떤 복합적인 상징성으로 나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동슬라브 신화에서 물은 세계창조의 첫째 요소로 대지와 결합되어 창조의 근본 물질이 되고 있으며, 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에서도 물은 원초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이처럼 신화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이야기와 4원소의 복합적인 이미지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상상하는 자들 간의 소통을 상징하는 ‘반영하는 물의 신화’에 관한 분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물질은, 물질로서의 성질들은 특정 대상의 어떠한 형태와는 달리, 시각뿐만 아니라 오관 모두를 통해 지각될 수 있다. 물질적 이미지는 이와 같이 오관 모두를 통한 표상 작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은 흘러가며, 맑고, 깊다. 또한 시원하기도 하며, 차갑기도 하다. 또한 냄새가 나는 물도 있다. 물이 갖는 이와 같은 물질성을 통해 이미 상상력의 폭과 자유를 보여줄 수 있다.




상상력에 대하여


바슐라르는 우리의 상상세계는 근본적으로 부드러운 물의 지배 아래 있다고 보았다. 부드러운 물에 의해 탄생되는 물의 상상세계는 네 가지 형태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로 물의 물질적 상상력은 인간이 직접 물과 접촉을 함으로써 어떤 관능미를 느끼며 무의식의 세계가 근원적으로 물에 의해 물질화된 경우를 의미한다. 즉 물과의 접촉만으로도 우리는 상상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문화의 콤플렉스에 대한 것이다. 문화적 콤플렉스는 물리적인 물과의 접근에서 곧바로 물질화된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책이나 전설, 또는 신화에서 비롯된 이야기의 영향이 한 요소에서 무의식의 세계에 뿌리박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물질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으나 역시 근원적으로 인간의 상상세계에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물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셋째는 역동적 상상력이다. 물의 물질적 상상력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 상상력을 지배하는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더 능동적이 되어 인간의 의지력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가령 맑은 물은 순수화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는 물의 이미지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성적 상상력은 어머니 또는 다른 여성에 대한 추억이 무의식에 은밀하게 남아 있어 물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을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모유에 대해 알게 된 액체, 또는 유동성의 이미지가 무의식에 스며들어 그 상상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결과인 것이다.


이렇듯 바슐라르는 상상력이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을 깨닫고, 상상력을 연구했다. 그의 문학사상은 자신의 상상력 이론에 종속되며, 모든 예술은 상상력의 범위에서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상상력이 언제나 바라는 대로 창조적 변화를 이끌 만큼 강한 힘을 가졌다면, 불과 물 몇 방울로도 영세의 모든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상상이 배제된 현대 사회에 대하여(공간의 시학 참조)


바슐라르의 저서 중 공간의 시학이라는 책에서는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내용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미지가 표현의 생성인 동시에 우리들의 존재의 생성 표현이 바로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렵게 다가가면 존재론에 관한 지식과 그에 따른 철학들을 생각해야 하지만, 단순히 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와 상상의 생성이 존재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바슐라르는 상상력과 문학과 예술, 심미적 체험이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분명 중요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보편적인 본질이라는 것은 하나에 집중된, 그리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본질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슐라르가 말하는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그는 상상력의 영역에서는 일체의 내재성에 초월성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단 내재성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고, 초월성은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은 세계라고 해석은 하였지만, 크게 와 닿아 이해되는 부분은 아니다. 바슐라르는 공간은 이미지들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상상력의 범위이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이 부분으로 윗부분을 생각해보면 상상력은 일상의 수많은 것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것이 현실을 뛰어넘는 어느 지점이라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를 통해 물을 통해 현실을 뛰어넘는 지점을 생각할 수 있다.


바슐라르는 서랍이나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등의 원초적 이미지를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중점은 이런 원초적 이미지는 시의 이미지를 생성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서랍, 상자 등에도 우리들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대상들 속에 감추어진 내밀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물들에는 우리들의 과거, 현재, 미래가 응집되어 있고, 그것은 무한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처럼 상상력이 삶보다 풍요로운 것이 아닐까.

우리는 분명 범람하는 이미지, 시뮬라크르 속에 살고 있으며, 과잉 소비, 소모되고 있는 여분의 것들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런 것에 적응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문명화된 주변 환경과 가까워지고, 더 나아가 친숙해지고 있다. 이렇게 어떤 것과 친숙해지면, 그것들을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상상의 힘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내면의 영혼을 탐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물이든 말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물이라는 원초적인 물질에 대한 탐구는 의미 없는 허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가는 일상처럼 물도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보이고, 우리의 상상을 어떻게 이끄는지 탐구해보는 과정은 분명 의미가 있다. 우리는 범람하는 이미지에서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상상하는 것이 인간으로 가져야 할 근원적인 책임이라고 이야기했다. 상상력은 두 세계-현실(의식)과 공상(꿈-무의식)를 동시에 넘나들며 매개하고, 표면이 아닌 깊이를 통해 일상적인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며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물이라는 심연은 우리가 마주하면서 관능적으로 하나가 되고 싶은 어떤 것이며, 따라서 상상적 존재가 그 본질에 있어서 욕망하게 되는 물질적 상상력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이 지니는 복합적인 이미지와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이 내포한 소통의 의미는 결국 인간을 창의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바슐라르에 따를 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 항상 사실 이상의 것, 즉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을 향해 끝없는 모험을 시도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필자가 ‘공간의 시학’을 발췌한 이유도 ‘물과 꿈’에 대한 감상의 연장선에서 상상력이 지니는 힘과 그 힘을 무시하는 우리들 개개인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자 함이었다. 바슐라르의 저서들, 상상력 이론을 강조하는 그 모든 내용들은 분명 도시의 수많은 문명인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도시의 문명인들에게는 불만족과 소외가 가중되며, 자신의 일상과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항상 가까이 있는 일상의 소품들과 몸 안에 흐르는 물을 생각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다.


바슐라르는 이런 아쉬움 때문에 그 많은 상상력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과 관련해서 바슐라르의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밀한 것에서 무한한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 있다는 바슐라르의 말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상상력의 생동감과 역동성을 안고 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굉장한 경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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