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 언제 심어요. 지르며 삽시다.
나는 아주 탁월하게 뻔뻔하다.
스무살.
A라는 학점을 받고 이의제기를 위해 타학과 교수님 방문을 두드리는 순간에도 과연 이분이 내게 A+이 아닌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궁금한 게 다였다. 골때리고 뻔뻔한 신입생이라는 평이 의아했다. 그말을 듣기 위해 여기 온게 아닌데.
이례적인 재수강을 허락박는 것으로 일단락 되고 '새 마음 새 뜻'을 품고, 들었던 수업을 다시 들었다. 맨 앞 줄에 앉아 한시도 딴청을 허락치 않고 교수님의 인중을 노려봤다. (당시에도 나는 제법 예의바른 학생이었는데, 설마 내가 하늘같은 스승을 노려봤겠나? 감히...
골때린다/ 뻔뻔하다/ 노려본다/ 이 모두 상대의 말을 빌려썼을 뿐이다)
참 꾸준히 뻔뻔했다.
요리에 있어서도 외주란 없었다. 신혼 초 시아버님께서는 내가 정성을 다해 끓여드린 미역국을 드시곤 혀를 내두르셨다. 느닷없이 미역 알레르기를 호소하신 까닭에 그 다음 해부터는 수고가 줄었다. 당췌 어떤 결과물이었기에? 기억도 없다. 이렇다할 레시피가 없어서다.
음식을 만들 때 나는 주로 전에 먹어본 기억을 떠올리거나, 처음 접한 음식일 경우 그저 완성된 이미지만 잠시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럼 됐다. 바로 장을 보고 팔을 걷어 부친다.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이상하게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단 한번도 친정 엄마나 할매로부터 요리법을 전수받은 적도, 심지어 어깨너머로 배울 기회도 없었지만 두렵거나 어찌 만드나~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이를 어쩐담.
그렇다보니 처음 미역국을 끓일 때도 물과 미역, 마늘 따위를 다 때려넣고 나서, 끓이다 말고 참기름을 좀 더 넣은 후(식용유는 아니었을거다) 문제의 간장을 잔뜩 붓고는(간을 뭘로 할지, 얼마나 넣을지의 고민도 보통은 가뿐히 건너뛰니까) 이른바 국물 맛을 낸다며 멸치와 양파 간 것을 곁드렸었다. (곁드린다는 행위가 왠지 고급져 종종 했던 시절) 없던 미역 알러지도 생길만했다. 감사하지머.
한동안은 콜라겐 껍데기에 반응하는 깡마른 첫째 아이를 위해 부지런히 냉동족을 사들여 일회용 면도기로 돼지털을 제거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었다. 족발마저 집에서 해대는 지경에 다다르자 배달음식에 대한 가족들의 동경은 날로 깊어졌다.
스테이크, 브로콜리스프, 등갈비, 월남쌈, 마라탕, 마늘보쌈, 장어탕, 팥칼국수, 감자떡, 수박설기, 마카롱... 아이들이 제법 반응을 보이는 음식은 첫 경험 이후엔 늘상 우리집 주방에서 볼 수 있었다. 이제 약식은 격주로 한다. 한살림 쌍화탕 두개에 계피만 있으면 얼추.
밀키트가 아닌 뼈속까지 핸드메이드 작품들에 가족들만큼 나도 살짝 지쳤다? 질렸다? 뭐가 더 적합할런지.
40이 넘어가면서 음식을 하고 나면 가족들의 식사시간에 주로 난 나가 떨어져 있다. 몸져 누운거 맞다.
별 게 다 뻔뻔하다.
손을 잘 드는 학생이었나. 심히 자발적인 건 맞는 듯 하다.
저걸 내가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망설임이 부족하다. 대학입시를 말아먹고, 공부말고도 취미삼을 게 또 없나 찾다가 아무리 둘러봐도 영~ 마땅치 않아 내가 만들자! 택한 게 댄스동아리였다. 남편도 모르는 흑역사.
왜 하필 댄스였을까? 듣는 장르도 부르는 장르도 한결같이 발라드인 나인데.
여자 기숙사 사감님 방에 찾아가(징하게 이방 저방 노크를 하는 몹쓸 버릇이 좀 있다) 기숙사 문화의 메마름을 굳이 문제삼고 나니,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활동이 지원됐다. 기숙사 식당 입구에 떡 하니 '신입생이 회장이라는 점'을 강조한 신규 동아리 모집 공고문이 붙여졌다. 엿 먹으란 건 아니었을거다. 세상은 의외로 아름다우니까. 2002년 치고 참 개방적 사고를 가지신 어른이었나 싶다.
첫 모임.
기숙사 헬스장 안 작은 거울방 안이 미어터지는 예기치 않은 광경에 숨이 가빠졌다. 나지막히 뱉은 첫 마디.
아~ 씨...
망 했 다 !
소모임을 원했으나 남자포함 마흔 두명의 회원으로 첫인사를 나누게 된 거다. 사감님의 '사감다운 배려'로 마이크까지 잡게 된 나는 차마 ㅠㅠ '제가... 춤을 못춰서요'라는 말로 운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춤을 못 춘다. 그냥 못 춘다기보다 아예 못 춘다.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킨 후 최대한 발랄하게 웃어 보였다.
운동이란 게,
이렇게 다수가 한 꺼번에 효과를 보기란 참 어렵거든요(애쓴다).
소그룹을 리드할 팀장들이 필요해요. 도와주실 거죠?
고맙게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 체육과 인싸들, 전직 댄스동아리 출신 뽀대나는 팀장들이 여섯이나 지원을 해 왔다. 오케이. 살았다.
그 후로 새벽마다 몸을 불사르기 위한 동행이 계속되었고, 우리 동아리는 급기야 학교 축제 때 오프닝과 특별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기까지 했다. 기숙사 오픈 하우스(학부모님 개방의 날)행사 때는 대강당 무대에 창의적 리더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며 어줍잖은 환영인사까지 능청스레 해 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후로 3년 간 단 한번도 남들 앞에서 춤을 선보이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 아무로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의 댄스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와 가슴을 쓸어 내린다. 큭
뻔뻔함이 필요하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부모로 살아가는 시간 속에 겸손이라는 덕목은 안 갖추레야 갖추지 않을 수가 없다. 벼가 익어서 고개를 숙인다기 보다는 아이를 두고는 절로 고개를 조아리며 살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러 차례 즈려 밟혀도 보고 낯 뜨겁게 실패도 맛보며 산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뻔뻔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작가들의 필력에 감탄하다 못해 사랑에 빠지고(독서중에만 금사빠)
새롭게 알게 된 매력적인 단어를 나도 따라 글에 슬쩍 넣어 보고는 그런 내 모습에 반하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하다 말고, 청중이 오늘 부터 '새 삶'을 살게 될 것에 미리 감탄하거나 내가 설레고.
잠자리에 누워 그제서야 실소한다. 피식.
'새 삶'은 개뿔.
뒷심이 부족한 게 문제지만 명품백은 안 질러도 난 참 많은 걸 지르며 살고 있다.
해서 안 될 거란 염려가 애초에 없다. 안되면 말지? 그러다 또 하지 뭐.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자.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꼭 나쁘지 만은 않다.
오늘은 무얼 지르면 좋을까?
글이 안 써져서 마음이 무거운 우리 "얘들아(글쓰기 모임)"의 옆구리를 오늘도 쿡 찔러보고 하루를 시작해야 겠다.
오늘이 본인
발행일이 아니어도 좋으니
글 한 번 질러 보시죠? 네?
뻔뻔하게 쓰며 살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