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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si May 28. 2023

발 다른 자매의 몹쓸 친밀감

안중근에서 이토히로부미로 돌연 변신한 사건

어릴 적 언니는 독립운동가였다. 북한군도 벌벌 떤다던 중2 즈음부턴 출입이 무상했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가 느꼈다던 '넘지 못할 낯섬' 그녀에게도 있었다. 내게 언니란 그랬다.


남들에게 자매라면 형제완 달리 부비고 의지할 평생친구라지만, 곁에 없으니 기댈 기회조차 잡기 어려웠다. 한 번 나가면 멀리 다녔고, 돌아올 날짜를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 독립투사들과 닮아 있었다.


언닌 초등시절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공부도 잘해, 운동도 잘해, 얼굴 예쁜 건 말해 뭐 해, 인기도 많아, 저 잘난 걸 저도 아는 도도함까지.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함 탓에 내겐 '미술관 벽 그림' 같았다.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내게서 나라를 빼앗아 간 이토나 다름 없어지곤, 오래도록 우린 말도 섞지 않았다. 마주해 봐야 두어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자매였는데 안부도  묻지 않고 살았다. 




첫 교생실습을 앞두고

그러거나 말거나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이번에도 고모가 나를 챙겼다. 감각 있고 돈도 있는 고모만 내게 실습 채비를 해줬다. 신촌 현대백화점을 한 바퀴 도는 수고 말고는 아무런 노력 없이 내 손에 들린 노란 구두.

여느 때처럼 징한 노동을 수반한 후 얻었더라면 구두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무난함과는 거리가 먼 컬러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충분히 예쁘다. 용도는 신발인데 여전히 신지는 않는다.

눈에 담는 쇼핑을 즐기는 내가 마치 비교대상이 없는 듯 눈에 선택한 신발. 

언박싱의 재미를 위해 구매한 박스에서 꺼내지도 않고 장롱 깊~~~숙이 넣어 두고는 매일 '꺼내고 넣고'를 루틴으로 삼았다.

매번 처음인  새 마음 새 뜻으로^^


3-4일째부터는 애초에 그러기를 규칙으로 삼은 사람처럼 구두를 꺼내어 방바닥에 두고, 감히 발을 넣어 신고는 차마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거울에만 잠시 비춰본다.

 '살짝 웃고' 이게 뭐라고! 다시 박스에 넣어두기를 일주일 째.




문제의 그날도 같은 루틴 반복.

일주일도 지났으니 아스팔트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방바닥을 몇 걸음 걸어보려는 마음도 있었을 시기였다.


마음으로 인사를 건내 듯 짜잔~ How's it going?


박스뚜껑이 개봉됨과 동시에

일. 시. 정. 지

없다. 구두가 거기 없다.


뭐라도 유추해 볼 방도도 없다. 다 없다.


집에 도둑이 들리도 없고. 엄마 240. 아빠 265. 할머니? 에이~


연결 지을 대상이나 상황이라곤 전무한데 신발이 없다. 내 주머니사정으로는 도저히 얻으래야 얻지 못할 고가의 구두가 돌연 증발했다.

누구? 누구랄 것도 없는데...

머릿속이 하얗다. 아니, 노랗다.




그렇게 하루 하고도 반나절.

찾고 말고 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엄마 아빤 횡설수설대는 내 말에 미간 주름만 잠시 패여 보이는 위로를 건넨 후 다시 바빴고.

서울에 있는 제공자 고모에겐 급한 대로 전화는 걸었으나 물을 거리가 딱히 없어 끊었다.


그날, 다음 날, 이틀을 알바를 어찌했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오니 몇 달 만에 어쩐 일로 언니가 와 있다. 할머니 밥이 그리워졌나,  아님 돈이 떨어졌나. 짤막하게 인사만 나누고 거실로 나오려는데 뒷 목이 서늘하다. 서얼..마!


후다닥 장롱문을 뽑아내듯 당겨 박스뚜껑을 열자마자 상스럽게 욕을 뱉었어야했는데 그마저도 안 나오고 주저앉기만 한 게 아니라 기어이 눈물까지 고였다.


여기저기 스크래치.

상자 가득 모래??

굽 부분 가죽이 뜯긴 데다.

거뭇거뭇 비벼도 지지 않는 알 수 없는 검은 흔적.



모래가 왜에~~~~~!! 어?



내 말에 대답하란 말이다. 귀가 먹었나. 동문서답이다.


그걸 왜 거기다 넣어놨냐  넌?



먼 헛소리야. 이게 미쳤나.



약속 있어서 하루 빌렸어.  


적당히 눙치고 넘기려는 솜씨가 대단하다. 욕이 절로 나온다. 



빌려? 빌리는 게 뭔데?
누구한테 빌렸냐고!
훔친 거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을 길이 없어 내가 미쳤다.

대화는 어렵다. 아. 진짜 돌겠네!

성질을 삭이질 못한 늙은 개마냥 정신마저 오락가락했다. 생생하다.


일주일 겨우 길지도 않게 애지중지.

참 깊숙이도 보호한 건  그년(아니 그녀)의 용감한 범행을 염두에 둔 탓은 아니었는데.

그저 눈으로만 봐 온!

하...  겨우 신고 방바닥도 몇 걸음 걷질 못한 내. 내. 구두가 처음 만난 마찰물이 동해바다 모래사장, 모래들이라.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저걸 신고 대체  한 거야. 자초지종이란 없다. 빌렸댄다. 빌렸대! 와~~~~~~열받네. 도대체 누구한테 빌렸냐고.

거울 보며 빌렸냐?ㅠㅜ




게다가. 넌 235. 난 225.

하루 만에 신발이 커지는 놀라운 경험들 해보셨나 몰라. 구두는 내 것이 아닌 게 되었다. 모습. 크기. 다 그랬다. 배다른 자매도 아니고 발 다른 자매끼리 굳이 신발로 친밀해야 합니까?


(추억? 그딴 거 없고, 지금 생각해도 열받습니다)

그렇게 그 '신봘사건'으로 언니와 나 사이에 얼음벽이 생겼고, 엘사와 안나 못지않은 거리감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뭐. 그 사건하나로 충족될 밀도는 아니다만)

안 그래도 그리움 반. 원망 반.으로 밉기만 하던 언니를 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신발도둑.

이야~ 어째서 네겐 제 물건과 남의 것 사이에 경계란 없냐. (요즘도 어쩌다 대화주제로 오르면 나 혼자 성을 내고 언닌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심지어 웃는다.. 이런. 씨)


결국 교생실습 내내 몇 번을 신었나 손에 꼽는다. 잔뜩 늘어나 커서  신고, 열받아서  신었다.

예쁘지만 헌 구두가 되어 버린 신발을 볼 때마다 허공에다 다양한 방언을 퍼부었다.


다 지나간 일이라며 뒤끝 없이 지내보자 다짐한 후에도 몇 년간 나는 언니 생일이면 반드시! 구두를 선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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