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osi Jun 13. 2023

밤새 수갑을 채웠다

여름밤을 안전하게 지키는 부모라면

뽀송뽀송한 여름밤나기.

시원한 맥주에 치킨을 나도 가끔 상상했었다.

딴 세상 얘기다만.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수면 리듬이 생긴다는 100일이 지나곤 한결같이 우리 집은 7시 30분이면 소등이었고, 신혼 때라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늦어도 9시면 몸을 누이는 남편은 연애 때도 주말아침 6시 40분이면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어  조조영화 시간을 친절히 확인시켜 준 사람이다. 철저하게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웠던 사람과 어떻게 사랑을 하고, 어떻게 10년을 넘도록 한 집에서 살았나 그도 그렇고 나도 대견하다.


밤이랄 게 로맨틱하거나 풍요로울 기회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 야식이래 봐야 7-8시를 넘기는 일은 손에 꼽고 밤산책, 야경, 치맥 등 남에게 자연스러울 일상도 대체로 내게 낯설었다. 

특식을 차려주는 마음으로 아빠가 늦는 날이면 일부러 8시가 넘는 시간에 텅 빈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려가 그네를 태운다. 첫째를 데리고 둘만 머무는 밤책방에 가서 10시고 11시고 마음껏 책을 읽는 까닭도 같다. 심지어 요즘은 아빠가 잠들면 자는 척을 하던 아이가 살며시 나를 흔들어 깨우고는  눈을 찡끗 한다. 조금만 더 책을 읽다 자겠다는 애교다. 우리 집이 이렇다.

해가 지고 하는 산책은 꿈도 못 꾸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도 9시면 빛을 찾기 힘든 집에 살지만.

들의 것을 누리지 못했기로서니 마음마저 깜깜하진 않았는데.



2019년의 여름밤은 내내 철저하게 몸과 마음이 칠흑 같았다.


둘째 아이가 고작 8개월 젖먹이 시절. 

첫 수술을 치렀다. 그 후 3개월이 꼬박 여름이었던 게 아직도 가끔 억울하다. 강보라고 부르던가?

영아들이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어 제 얼굴에 상처라도 낼까. 움찔움찔 제 힘에 놀라 잠에서 깰까 봐 생후 몇 달간은 넓고 얇은 아기보(강보)로 몸을 감싸 재운다.

손은 차렷자세. 나름의 방식으로 매두는 게 아가에겐 더 안정감을 준다고 조리원  베테랑 선생님들께 받아 적으며 배웠다.  해서 나뿐만 아니라 보통의 초보 엄마들이 곧  따른다. 나 역시 첫째도 둘째도 그렇게 키웠다.




수술 후 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던 둘째는 통증과 이물감에 쉼 없이 울어댔다. 피눈물과 고름만이 문제라면 불을 끄며 내 슬픔도 덩달아 꺼보련만. 


"엄마~"라는 단어보다 먼저 알아버린 "아파~"라는 말이 자꾸만 아빠~로 들려 남편은 "아빠 아파"라는 말이 가슴에 덧 새겨있다고 했다.  아이의 두 손이 자꾸 닿지 말아야 할 수술부위로 향하고 괴로움에 우느라 밤이면 삼킨 젖도 다 토해내기 일쑤였다.


이럴 땐 눈물이 다른 구멍으로 나와주면 좋으련만.

아픈 곳이 눈인데 '하필 눈물은 왜 눈에서 나오냐고' 말 같지도 않은 원망으로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짝 말려도 될까 말까 한 환부에서 밤새 멈출 줄 모르니 기어이 나도 따라 울었다.



수술은 아이에게 '안 간 힘'을 선물했다.

강보로 싸 놓는 것으로는 안전하게 긴긴밤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당시 수갑 역할을 제대로 못해낸 죄로 현재까지 아이들 목욕수건으로 쓰임받고있는 그것들


보호안경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영아의 강력한 '팔버둥'(우리에겐 발버둥 못지않게 두려운 그것).

결국 남편과 나는 힘없는 강보대신 밤새 수갑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왼손은 남편. 오른손은 나.


아프지말라고 아픔에 아픔을 더하던 수갑, 핏대선 부모의 손


돌도 안된 아이의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팔을 지키는 일이 이 아이의 두 눈을 지키는 일인 그때.

잠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며 손을 지켜내려면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두 손을 모두 써야 했기에 모로 눕기만 해야지. 감히 우리에겐 뒤척임이나 돌아 눕는 일이란 허락되지 않았다. 

손만 저리면 다행인데 한쪽 몸이 통으로 저린 날이 반복되었다. 어떤 날은 남편이 기어이 나를 깨워 피곤에 절어있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바꾸어 눕기도 했다.

유일하게 잠이 들어야 아프기를 쉬어가는 아이라.. 깨지 않도록 하려면 그마저도 큰 맘을 먹어야 가능했다.




사흘 째부터 아이 손목에 땀띠가 돋기 시작했고,

닷새쯤 되니 아이 팔에 멍이 차올랐다. 그렇게 우리 둘 마음도 잔뜩 색이 입혀졌다. 


행여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거실 에어컨을 틀어두고 빼꼼 문을 열어두는 건 부모사랑. 단 며칠 만에 관뒀다.

첫째는 멀찍이 바닥에 혼자 두고,  넓은 침대를 두루 쓰질 못해도 억울할 것 없이, 우리 셋만은 몸을 밀착해야 인간 수갑을 채울 수 있다. 거리를 두면 조금 덜 더울까 싶어 뻗어라도 보지만 제 아무리 팔이 길어도 더위를 달랠 방도가 . 아니, 팔을 펴면 곤란하니 안방 에어컨도 틀자.

해보면 알겠지만 모름지기 부모는  팔을 길게 뻗으면 안 된다. 자칫 깊은 잠이 들고야 말면 그 팔에 힘이 덜 들어간다. 그나마도 바짝 붙어 각을 만들어야 순간적인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다. (특수상황에 터득한 쓸모를 잃은 노하우입니다만)



그 아이는 얼마 전 더 고약한 수술을 치렀다.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 우리 부부가 감내한 밤은 춥디 추운 겨울밤이었다. 수갑을 채워도 땀띠만큼은 나지 않는 겨울밤. 

오히려 아이에게 온기를 전할 수 있어 서로 감사한 밤이었다.

다음번에도 이왕이면 여름밤보단 선선한 가을이면 좋겠다. 겨울이면 더 좋고.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밤은 추억이 방울방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