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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Oct 14. 2015

열심히 뛰었지만
막차는 떠난 뒤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열심히 뛰었지만 막차는 떠난 뒤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택시를 타면 얼마가 나올까. 할증까지 붙으면 삼사 만원은 거뜬히 나올 텐데. 종일 되는 일이 없더니 마지막까지 이 모양이구나.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게 눈치를 줘도 모르니 좋게 생각할 수가 없다. 하나 마나 한 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사람을 붙잡아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혼자 차 타고 가버리면 난 어떻게 돌아가라고. 눈치도 양심도 없다. 다시 연락하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서 집에 가 이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옆에선 막차를 놓친 사람들이 택시를 잡고 있었다. 택시도 저 사람들이 다 가야 탈 수 있겠구나. 차가 많이 다니는 길도 아닌데 차라리 조금 걸을까. 마냥 기다리느니 큰길로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예전엔 음악 없이도 잘만 걸었는데, 요즘은 이어폰 없이는 밖에 나오질 못하겠다. 생각해보면 음악만큼 빈자리를 쉽게 채워주는 것도 없다. 혹시 너도 그랬던 걸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굳이 널 떠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힘든 하루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비가 온 뒤 날씨가 꽤 추워졌다. 바람은 불지 않지만 손끝이 시렸다. 목도리를 여미고 두 손을 주머니 깊이 넣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지나는 택시가 있으면 잡으려 했는데, 두 곡의 노래가 끝나도록 차는 한 대도 지나지 않았다. 계속 기다렸으면 한참 뒤에야 집에 갔겠구나. 걸어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큰길엔 차가 많았다. 지나는 택시마다 사람이 타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조바심이 나진 않았다. 택시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한 대만 오면 되는데 뭐, 금방 오겠지. 곧 집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자 긴장이 풀렸다. 작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택시를 기다렸다. 언뜻 길 건너편을 보니 몇 사람이 택시를 잡고 있었다. 이내 한 대가 도착해 한 사람이 먼저 타고 세 사람이 남았다. 두 사람은 일행이고 한 명은 모르는 사람인 듯했다. 이쪽엔 나뿐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쯤, 건너편에 또 한 대의 택시가 도착했다. 괜히 약이 오르는 기분이었지만 여의치 않기로 했다. 겨우 기분이 좋아지려던 참인데 괜한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저 앞에 신호가 바뀌었는지 지나는 차가 뜸해졌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려나. 지금 몇 시쯤 됐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려는데 마침 택시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다.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가며 혹시나 싶어 길 건너편을 보니 맞은편에도 택시가 와있었다. 타이밍 참 기가 막힌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그대로 멈춰 섰다.

지나는 차가 모두 사라져서일까. 조금 전까진 이렇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길 건너편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또렷하게 보였다. 남자였다. 그래 거기까진 조금 전에도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떠난 뒤 남자 혼자 남아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탄 건 분명

너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난 보았다. 너라는 걸 눈치챈 순간부터 네가 택시에 타 문을 닫고 차가 떠나기까지의 모든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하나하나 선명히 보였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어디 가는 거야. 어째서 아까는 몰랐지. 왜 이제야 본 거야. 너도 날 보지 못했던 걸까. 저만치 멀어진 택시의 뒤를 멍하니 보고 섰다. 창문을 내린 택시 아저씨가 안 탈 거냐며 소리쳤다.

택시가 떠났다. 난 여전히 인도와 차도가 맞닿은 곳에 위태롭게 서 있다. 네가 없이도 충분히 긴 하루였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2011.11.21.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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