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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Nov 27. 2015

얕게 쌓인 첫눈이 모두 녹아내리도록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손끝이 자꾸 시리기만 하다.

얕게 쌓인 첫눈이 모두 녹아내리도록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다. 너와 난 말이 없고 나이 먹은 그네만 홀로 신음하듯 끼익 소리를 낸다.
몇 명의 친구가 모인 자리였다.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고, 늘어가는 술잔만큼 과장된 감정과 목소리가 쌓여갔다. 너와 난 약속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친구들을 배웅하고 방향이 같은 너와 난 자연스레 함께 걸었다. 술자리에서 오갔던 화제들을 다시 꺼내 대화를 이어갔다. 말은 넉넉지 않아 자주 끊겼다. 넌 말이 많지 않았고 나 또한 그랬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건데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웠다. 집 근처 놀이터를 지나다 용기를 내 너에게 물었다. 잠깐만 앉았다 갈까? 술 좀 깨고 들어가게. 부모님 계신데 좀 그래서. 넌 내가 가리키던 놀이터를 보더니 별 고민 없이 그래, 라고 말했다. 녹다 만 눈이 듬성듬성 남아 벤치엔 앉을 수가 없었다. 놀이기구 사이를 배회하다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유독 말끔한 얼굴의 그네는 아무래도 누군가 먼저 다녀간 듯했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놀이터 여기저기 성기게 남은 첫눈도 녹아내렸다.
더디게 오가던 대화가 끊긴다. 입술을 몇 번 띄었다 모으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허튼 얘길 하고 싶진 않았다. 공연히 발을 딛는다. 가만 앉아있는 너의 앞뒤를 오가며 너의 뒷모습을 보고, 네가 없는 허공에 잠시 머문다. 이 모습이 너와 나의 관계 같아 웃음이 났다가 금세 서늘해진 마음에 땅을 짚고 그네를 멈춘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네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숨을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은 그쳤지만 아직 구름은 하늘 곳곳에 넓게 깔려있다. 하- 길게 숨을 내쉬어보지만 입김은 힘없이 채 멀리 가지 못한 채 흩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네가 말한다. 춥다, 그만 가자. 응. 난 힘없이 대꾸한다. 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지만 마냥 앉아있을 수도 없기에 애써 힘차게 일어나 걷는다.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 말없이 걷는 이 길이 참 길게 느껴지다가도 그게 너라서 또 빠르기만 하다. 옆에 있어서, 그게 너라서 더 외로운 걸 네가 알까. 너의 얼굴에 잠시 머물던 내 시선을 행여나 네가 눈치챌까 서둘러 거둔다. 하릴없이 눈으로 얼룩진 발끝만 쳐다본다.
겨울이 깊어간다. 이 끝에 봄이 있을까.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손끝이 자꾸 시리기만 하다.


사진 : MorZ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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