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25

by 오롯

모처럼 주말, 남편은 차를 타고 어딘가에 다녀오자고 했다.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하는 듯싶더니 모교가 있던 동네에 가서 좀 걷기도 하고, 점심도 먹고 오자며 카메라까지 챙겨 들었다. 아이들은 어디 가는 거냐며 계속 물었지만 사실 나에게도 낯선 동네이긴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대학원을 다닐 때 이미 우린 부모였고 육아와, 일로 바빴던 시절이었기에 학교 근처를 돌아다니며 즐길만한 낭만과 여유는 없던 시기였다.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은 막상 가보니 두 시간은 대기해야 한다는 말에 돌아 나왔다. 다른 식당을 찾았다며 그쪽으로 가보자는 남편을 따라 나오는 길에 보니 바로 근처엔 동네 도서관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여기 들리자고 했다. 오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새로운 도서관에 들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십분 남짓 더 걸어가는 길을 따라 귀여운 가게들도 보였다. 문을 열고 나오는 손님들 뒤로 초콜릿 향이 강하게 풍기길래 보니 작은 초콜릿 가게였고, 옆에는 딱 봐도 먼지 냄새 폴폴 날 정도로 오래돼 보이는 동네 서점이 있었다. 햇빛이 쨍한 날씨였지만 아직 찬 바람이 많이 불었기에 여기저기 둘러보지 못한 채 들어간 햄버거 가게는 맛이 유별나게 훌륭하진 않았지만 허기를 채우고 몸을 덥혀주기엔 충분했기에 아이들은 오던 길에 보았던 서점도, 초콜릿 가게도, 도서관도 들려볼 흥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서점에선, 입이 떡 벌어질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를 제외하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구간에서 신간까지, 중고책부터 새 책까지, 그림책부터 철학책까지 모든 종류의 책들이 그 작은 공간을 세로로, 가로로 꽉꽉 채우고 있었다. 여행, 논픽션, 픽션, 아이들 책 등 굵직한 카테고리들을 알리는 손글씨 사인 말고는 아무런 지표도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화제의 책들은 또 눈에 띄는 곳들에 무심하게 던져진 척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린 모두 각자 흩어져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가 버리고 간 거 같은 느낌의 오래되다 못해 얼룩이 묻은 책까지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여서 이 방대한 책들을 마냥 훑어보며 책을 고를 시간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다음에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면 사야겠다고 맘먹었던 The Goldfinch를 찾아보기로 했지만 그 많은 책들 가운데 원하던 책 한 권을 찾게 될 확률은 더 작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지금 이 책들이 어떤 룰을 따라 꽂힌 건지 알아내려 하고 있어 “라고 말하자 큰아이는 ”엄마, 그런 룰 따윈 없어. 그냥 자리가 생기는 곳마다 다른 책들을 갖다 꼽는 거야 “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지 싶었다. 한 권이라도 사 가고 싶은 마음이 같았는지 남편은 Quentin Blake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담긴 출판된 지 20년도 더 된 책을 찾아내서 사자고 했다. 빨리 책을 넘기며 내용을 살피던 우리는 갑자기 후반부에 9명의 나체 여성들이 나오는 페이지를 보고 기겁을 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물론 그의 특유의 스타일로 그려져 있었기에 결코 선정적인 느낌도, 내용도 아니었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반대했다. 만약 내용을 보지 않은 책 책이 예쁘다며 그냥 사갔다가 집에 가서 그렇게 놀랐을 상상을 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편은 내가 찾던 책이 있는지 주인 할아버지께 물어봐주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없는 거 같다며 (역시나) 찾지 못했다. 우연히 아무 기대 없이 들어왔다 이렇게 엄청난 곳을 발견하는 경험은 정말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아마도 엄마는 앞으로 살면서 또 이런 곳을 보게 되긴 힘들 거 같은데 너희들은 벌써 보게 됐다니 큰 행운이라고도 덧붙였지만, 역시 아이들답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거 같았다. 물론 기필코 다음에 또 찾아오겠지만 (그전에 사라지지 않기를), 오늘의 이 느낌과는 분명 다를 것이기에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초콜릿 가게에도 들어가서 핸드메이드 작은 머그컵을 샀다. 아이들 핫코코 마시기에 딱 적당한 사이즈라 아이들에게 각자 원하는 스타일을 골라보라 했는데 큰아이는 고슴도치가 그려진 걸 가리켰다. 남편도 나도 마주 보며 ‘자기랑 딱 닮은 걸 골랐네’ 하며 웃었다. 까다롭고 까칠한 거 같으면서도 속은 말랑말랑한 미워할 수 없는 아이.


마지막으로 들린 도서관에서 작은 아이는 펼쳐져 있는 대형 사전을 뒤척이다 오빠의 이름과 아빠의 이름을 찾아봤다. 둘 다 다소 흔한 이름인지라 사전에 나와있었다. 사람이름이라는 정도 외의 특별한 뜻은

없었지만, 작은 아이는 흥분해서 자기의 이름도 찾아봤다. 의도치 않게 아이에게 흔치 않은 영어 이름을 지어준 탓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두꺼운 사전인데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으나 없었다. 금세 의기소침해져 It’s not fair! How come only my name’s not here를 외치는 아이에게 아니라고 엄마 이름도 없다고 당당히 외치며 사전을 펼쳤는데, 이게 왠 걸. 어이없게 영어 이름도 아닌 나의 이름이 중국의 어떤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쓰는 언어라고 나와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를 꼭 끌어안고 너의 이름은 너무너무 특별해서라고 달래줘야 했다.


언니에게 오늘 가 본 서점에 대해 얘기해 주니 거기서 책을 발견하는 건 serendipity네 하고 답이 왔다. 정말 맞는 거 같다며 작은아이에게 이 얘기를 해줬더니 아이는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일들이 그렇다고 했다. 만약 처음 들른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면 초콜릿 가게도, 서점도, 도서관도 지나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니. 정말이지 그랬다. 아득했던 마음이 찰랑 거리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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