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일하는 곳의 특성상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의 환자들을 보고 있다. 아이들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크고 작은 웃음들이 터질 때가 있다.
진료가 시작되고 차팅을 할 때 지금 현재 있는 이들을 먼저 체크하는 과정이 있다. 모든 이에는 각자 해당되는 고유의 넘버링이 있는데, 영구치일 경우 맨 위 오른쪽 이부터 시작해서 1, 2, 3.. 이렇게 평범하게 시작하지만, 어린아이들의 경우 A, B, C.. 이렇게 알파벳으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경험상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는 환자들을 만난 본 적이 없는 만큼, 치과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 더욱더 갑자기 시작되는 알파벳의 향연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보통 아이들에게 ‘이제 너의 이가 몇 개 있는지 세어볼 거야’라고 말을 한 뒤 입을 벌리게 하고, ‘A, B, C..’라고 크게 외치면 함께 있는 어시스턴트가 해당되는 이들을 차트에 표기한다.
어느 때와 같이, 차팅이 시작되었다. 그날의 환자는 호기심 많은 눈을 반짝거리던 6살 남자아이였다. 치과 진료는 처음이라던 아이는 두리번거리면서도 얌전히 의자에 앉았고, 입도 순순히 벌렸다. 나는 너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며 A, B, C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아이는 ‘D, E, F, G~’ 하며 신나게 알파벳송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자칫 잘못하면 나의 손가락이 물릴 뻔한 순간이기도 했지만, 여태까지 주춤거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자기가 아는 게 나와 반갑다는 듯 미소를 띤 채 노래를 불러재끼는 아이의 모습에 나도, 어시스턴트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두고두고 일에 지칠 때면 꺼내보고 슬며시 웃음 짓게 되는 에피소드를 갖게 된 날이었다.
이렇게 어린 환자들을 보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겁에 질린 아이일 경운 어떤 식으로 소통해야 아이가 나를 믿고 진료에 응할 수 있는지 빠른 시간 안에 파악해야 한다. 결국 아이의 긴장과 두려움이 풀리지 않아 그날 진료를 다 마치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할 경우엔 내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이번 경험이 아이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앞으로의 치과 방문이 더 힘들어질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잔뜩 긴장한 채 들어오는 아이의 경우, 이미 과거에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은 흔적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고, 예전 직장에서 성인 환자들을 볼 때도 흔하게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 너무 안 좋은 경험이 있어서 치과를 싫어하게 되었다’ 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치과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 치과 의사의 잘못만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일말의 책임감이 느껴지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렇게 서로 웃음이 터지는 에피소드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아이도 기억해주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치과 갔던 게 언제인 거 같아 라는 물음에 지난주인가?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장 지난주에 있었던 일도 가물거리는 게 다반사인 아이들이니 아마 못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