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롯 Nov 12. 2022

한 줌의 핑크, 한 줌의 다짐

"엄마, 여기서 서로 잃어버릴 일은 없겠어. 핑크만 찾아가면 돼"

옆에서 열심히 페달을 밞으며 단이가 말했다. 정말이었다. 자전거를 타러 가면 드레스를 입을 수 없다며 샐쭉이던 은이에게 짧은 스커트를 입으면 되지 않겠냐고 내가 말했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방에 들어간 은이는 쨍한 핑크색의 튜튜를 입고 나왔다. 결국 핑크 헬멧에 핑크 재킷, 핑크 자전거까지 은이의 뒷모습은 완벽한 한 줌의 핑크였다. 아빠와 오빠에게 질세라 열심히 페달을 돌리는 그녀에게선 핑크 튜튜를 입기 전까지 툴툴거리던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뒤에서 따라가는 나를 보고 빨리 오라며 소리를 지르다가도 마음에 드는 나뭇잎이라도 발견하면 갑자기 멈춰 내려와 나뭇잎을 줍고는 만족스러운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보여줬다.


앞장서 가는 남편도, 군말 없이 따라와 준 단이도, 핑크색으로 무장한 은이도 그들을 비추는 햇살도, 단풍이 진 나무들도, 떨어진 낙엽들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결의 행복이다. 화려한 곳이 아니어도,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어도, 동네 공원에 나와 함께 자전거를 탈 뿐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는 이 순간 '이런 게 행복이지'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다. 사진을 찍었다. 기억해야지. 너무 힘들다고, 정말 이런 걸로 화내는 것도 인제 진저리가 난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올 때마다 꺼내보며 기억해야지.


사실 그런 순간은 너무 쉽게 온다. 이 정도면 되었다 느끼던 순간이 바로 전 날이었음에도 당장 오늘 아침부터 마음이 힘들다. 눈을 뜨자마자 애들 아침은 뭐 먹이지 걱정하게 되는 나 자신에게도, 분명 자기도 깨어 있는데 둘이 함께 집에 있는 날의 끼니 걱정은 항상 내가 하겠거니 여기는 거 같은 남편에게도 화딱지가 난다. 별 일도 아닌 거 같은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은이에게도, 울어버릴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약 올리는 단이에게도 마치 이런 날들만 계속해서 이어져 왔던 것 마냥 짜증이 난다. 하지만 가슴 한편 알고 있다. 평소 가장 먼저 출근하는 나 역시 아이들의 등교와 하교를 책임지고 있는 남편이 아이들의 아침과 점심을 알아서 챙기겠거니 여긴다는 걸, 오늘 끼니 따윈 나의 걱정할 바 아니라고 여기는 거 같아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남편이지만 어제 네 개의 자전거를 차에 싣고 내리는 수고를 당연히 도맡았던 사람 또한 남편이라는 걸, 동생의 애착 인형을 잡아채 기어코 울리고 마는 단이 또한 어젠 사진 찍는 걸 너무 싫어하면서도 헬멧 쓰고 가족사진 찍자던 나의 요청에 순순히 응했을 뿐 아니라 희미한 미소도 지어주었다는 걸,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징징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은이 또한 드레스 입고 공주 놀이를 하고 싶었던 마음을 바꿔 기꺼이 자전거 타는데 함께 해 줄 주 아는 의젓함을 가졌다는 걸. 나만 최선을 다 하는 거 같이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억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설령 그것이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족 간이라도 말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단이에게도, 은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시랑 하는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항시 내가 바라는 모양새가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진심을 기억하고 인정해줘야지 다짐해 본다. 그게 비록 언제 바닥날지 모르는 한 줌의 다짐일지라도. 


결국 아무리 평범한 일상의 행복같이 느껴지는 그 순간도, 우리 모두의 최선이 담겨있다. 어쩌면 서로를 향한 최선이 제일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는지도...


작가의 이전글 사람을 낚는 제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