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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Jan 19. 2023

‘엄마한테’가 아닌 ‘엄마나 아빠한테’

내가 보는 어린이 환자들은 부모님이 함께 오지 않는다. 이미 부모님들이 자신들 없이도 진료를 해도 된다고 서류를 작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전달 사항을 직접 말하게 될 때가 많은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자주 쓰고 있는 표현을 발견했다.


매 진료 시, 부모님에게 보내는 방문 편지를 딸려 보내면서는 ‘이 편지는 엄마한테 꼭 드려’


치실 사용법을 알려주고는 ‘아직 어려울 수 있으니, 잘 못 하겠으면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해’


칫솔 쓰는 법을 가르쳐주곤 ‘아직은 어리니까 이를 다 닦은 뒤 엄마한테 검사받도록 해’


등등 상황은 여러 가지였지만 궁극적 돌봄의 책임자를 무의식적으로 계속 ‘엄마’로 향하게 둔 것은 일관적이었다. 어느 순간, 아차 싶었다. 왜지? 나는 왜 계속해서 ‘엄마한테’라고만 말하고 있었을까?


막상 집에서 아이들이 크고 작은 필요들이 있을 때 당연스레 아빠가 아닌 나를 먼저 부르는 그 습관을 그렇게 고치고 싶어 했었으면서 말이다. 분명 똑같이 나도 쉬고 있고, 남편도 쉬고 있는 중인데, 혹은 나와 남편이 동시에 일 하고 있을 때도, 심지어 남편은 쉬고 있고 나는 일 하고 있는 때에도 아이들은 ‘엄마’를 먼저 찾는다. 몇 번에 걸쳐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도 해 줄 수 있고 아빠도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많으니 꼭 엄마를 먼저 찾지 말고, 아빠에게도 물어보라고. 아빠는 컴퓨터로 일하고 있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엄마는 ‘not working’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돌이켜 보면 이런 상황이 남편도 아이들도 딱히 일부러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땐 워킹맘으로서 집에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 한다는 것에 대해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있었고, 그 죄책감은 집에 있는 만큼은 아이들의 모든 필요에 최선을 다해 응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주었다. 그것이 나 자신을 갈아 넣는 기분이 들 만큼 힘에 부칠지라도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당연스레 내가 집에 있는 경우엔 나만 찾았고, 남편은 남편대로 그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내가 더 필요를 잘 알아채는 거 같으니까, 내가 더 잘 봐주는 거 같으니까, 자신을 안 찾으니까, 그냥 자기의 일을 계속한 것이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단 한 방울의 물도 안 남아 쩍쩍 갈라지는 거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깨달았다. 이런 상황은 그 누구를 위한 최선도 아니라는 걸. 더 멀리 생각했을 때 나의 이런 태도가 나의 딸 은이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원래 여자는 밖에서 일을 하더라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엔 당연스레 육아의 대부분을 떠맡아야 하는 거라고 느끼며, 보며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은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다면,  출산 후에도 직장을 유지하기로 선택하든, 전업 주부가 되기로 선택하든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전심으로 응원할 테지만,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혹은 엄마이니 당연히 아빠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이나 그러지 못할 경우 미안함을 머금고 아이를 대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육아는 엄마의 전담 분야가 아니다. 아이가 나만의 아이가 아니듯이. 그리고 그걸 은이뿐만 아니라 아들인 단이 또한- 어쩌면 단이부터- 자연스러운 일로 인지하며 자라게 하고 싶다.


남편과 함께 여러 번에 걸쳐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나는 지금도 여전히 오해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알아가면서도 여전히 모르겠는 중이다. 가부장제의 여러 잘못된 관습들을 인정하는 남편은 나와 모든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같이 해야 한다 ‘라는 것에 절대적으로 동의하기에 우리는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길 소망한다. 이제 아이들은 무조건 나를 먼저 부르는 일들이 줄었고, 남편 역시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왜 그러냐며 먼저 나서서 챙기기도 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이 환자들에게 ‘엄마한테’라고 말하지 않는다. ‘엄마나 아빠에게,‘ ’ 부모님에게,’ 함께 사는 ’ 어른들‘에게라고 바꿔 말한다. 자의든 타의든 한쪽으로 쏠린 육아를 고되게 분담하고 있는 엄마들을 향한 나의 미미하지만 진심 어린 응원이자, 이 말을 듣는 아이들은 나보다 조금 더 균형 잡힌 어른으로 성장하길, 그런 사회를 이루길 바라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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