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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14. 2022

당신의 동영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대한민국은 소음 공화국

당신의 동영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꼬마버스 타요'가 30분째 상영 중이다.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때 무척 좋아하던 만화다. "기억 나? 너희도 봤던 거야."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예요." 그래, 나도 지금 듣고 싶진 않구나. 평일 오후, 아이들과 방문한 미용실에선 꼬맹이가 엄마 품에 안겨 이발 중이다. 기껏해야 3살쯤 됐으려나. 헤어디자이너의 가위질이 신경 쓰일 때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아이 눈앞엔 타요가 아이패드 안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신나게 노래하고 있다. 미리 예약을 했건만 아이들 이발 순서가 늦어진다. 기다리는 동안 읽겠다고 책을 들고 갔는데 도통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드디어 꼬마의 이발이 끝났다. 이제 만화 상영도 끝나겠구나. 원치 않는 소리를 듣는 건 괴로운 일이다. 듣기 싫을수록 소리는 어쩜 그리 더 생생히 귀에 꽂히는지. 그런데 아이의 영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 이제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저희도 본의 아니게 만화를 다 들었네요. 너무 시끄러웠어요."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아이 엄마는 여유롭게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고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아이는 '타요'에게 맡긴 채. "이제 집에 가자." 아이 엄마는 볼 일을 다 마친 후 그제야 만화를 끈다. 아이는 목놓아 운다. 



출처 :unsplah

  

카페, 식당에서 간혹 자신이 보고 듣는 걸 거리낌 없이 공유하는 이들이 있다. 분명 그곳은 그들의 안방이 아닌 것을. 음소거도 아니고, 이어폰도 없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욕구를 위해 동영상을 튼다. 옆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은 안중에 없는 걸까. 아, 저 사람이 가기 전까진 집중하긴 글렀구나.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는다. 정작 이어폰이 필요한 이들은 그들인데. 가서 그 귀에 확 꽂아주고 싶다.


  지난 주말 점심시간, 가족끼리 오붓하게 밥 먹으러 간 식당은 소박하고 조용했다. 옆자리엔 커플이 식사 중이었다. 갑자기 여자가 크게 웃어댔다. 어머나. 그녀의 목소리는 도드라졌다. 식당에 있던 이들은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날 때마다 여자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한창 데이트 중이어서 서로 눈을 쳐다보기도 바쁘구나. 식사가 다 끝났으면 그만 나가주면 좋으련만. 그들은 굳이 고기 국밥집에서 달달한 눈빛을 교환했고, 행복에 겨운 여자는 자주 스텐 쟁반에 돌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한국인이 목소리가 유독 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농경사회에서 대가족이 함께 살았던 영향이라는 해석이었다. "어이, 새참 먹을 시간이야. 어서 나와!" 널따란 논과 들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을 부르려면 목청껏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카페, 식당, 거리는 물론 지하철과 버스, 심지어 도서관에서조차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에 귀를 혹사당할 때마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왁자지껄하게 풀어냈던 과거 우리 조상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있는 이곳은 21세기 정보사회, 도시 한가운데 콘크리트 건물 안. 우리의 DNA는 시공간을 뚫고 면면이 이어져온다는 뜻일까.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책에는 프랑스 부모와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인 기자인 작가는 프랑스에서 경험한 아이들의 '아이스럽지 않은' 모습에 여러 번 놀란다. 프랑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악을 지르거나, 레스토랑에서 지루하다고 떼쓰지 않는단다. 부모가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이들은 얌전히 앉아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프랑스 엄마들은 통화 중에 아이가 칭얼대거나 운다고 전화를 끊고 달려가지 않고, 프랑스 거실은 아기용 천막, 미끄럼틀, 장난감으로 점거당하지 않는다. 어린이 메뉴도 따로 없어 아이들은 어른처럼 생산, 채소 등 거의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먹는다. 아이를 위해 온 세상이 돌아가는 듯한 미국이나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가 바라본 프랑스 부모의 육아법은 이러하다. 


"프랑스 부모는 흔히 아이들에게 ‘사쥬(sage, 현명해라)’라고 말한다. 미국 부모들이 ‘착하게 굴어라(be good)’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선 ‘현명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착해지라는 건 그것이 아이의 본성과 정반대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현명해라’라는 말은, 이미 아이에게 있는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존중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발산하는 소음을 마주할 때마다, 살면서 배우고 지켜야 할 기본 생활 예절 따위는 모르는 듯한 언행을 맞닥뜨릴 때마다 우린 유치원부터 다시 다녀야 하는구나, 생각한다. 나 우선인 세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걸 '자유'라 여기고 남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정작 이런 이들은 타인의 못마땅한 언행을 마주하면 거칠게 성낸다. 마치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는 듯. '내로남불'이 일반명사가 된 사회에서, 그들이 쏘아대는 민폐의 화살은 순식간에 불쾌와 미움, 원망을 솟구치게 한다. 행여 나 역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분노가 내 뒤통수에 꽂힌 적은 없었을까.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는 나만큼 남도 중요하다. 진짜 자유는 더불어 행복할 때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상식이 도덕 교과서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우리의 마음 그릇이 조금만 더 커지기를 바라본다. 배려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인격체도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이기주의자는 자기만을 위해 살아요. 그래서 인격을 못 갖춰요. 인격의 크기가 결국 자기 그릇의 크기예요. 이기주의는 그릇이 작기에 담을 수 있는 행복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100세를 넘겨 살고 있는 김형석 교수의 말이다.



© tinaflou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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