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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ug 20. 2022

엄마도 책상이 필요했어

글을 더 잘 쓰게 만드는 마법 1_공간의 힘

다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글쓰기를 불현듯 시작하게 된 날, 노트북을 펼칠 가로, 세로 50센티미터의 공간이 필요했다. 물건으로 촘촘히 채워진 집안을 쓱 둘러봤다. 안방, 드레스룸, 거실, 주방, 아이들 방, 화장실. 흠, 내 책상을 들일 여유공간은 없군.


일단 식탁에 노트북을 얹었다. 일과 후 부엌 식탁에서 글을 쓰는 사람을 '키친 테이블 라이터(kitchen table writer)'라고 하지 않나. 공간을 탓하느니 마음이 동했을 때 뭐라도 쓰는 게 남는 장사다. 노트북 주변으로 식탁 위엔 어느새 책이 하나 둘 쌓였다. 영감을 붙잡아 둔다고 끄적거린 종이가 더미를 이뤘다. 한참 읽고 쓰는 일을 하다 밥때가 되면 책과 노트북을 식탁 한쪽으로 쫙 밀고 상을 차렸다. 깨끗한 행주로 밥 먹은 흔적을 지우고 다시 쌓아둔 내 물건을 펼쳤다.    


글을 쓰다 막혀 잠시 시선이 저 멀리 떨어지면 언제부터 붙어 있었던지 밥풀이 말라있는 게 보인다. 햇빛이 내려앉은 식탁 위에 먼지도, 컵 모양 그대로 남은 물자국도. 글 쓰겠다는 의지도 충만하고 집중력도 한껏 올라갈 땐 밥풀도 물자국도 문제 되지 않는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다른 일을 저 끝으로 제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늘 그러하진 못해서 뭔가 쓰려는 찰나, 보란 듯이 나를 부르는 집안일에 흐름을 뺏긴다. 세탁이 끝났다는 알람 소리가 울리면 세탁기로 종종 달려가고, 식탁 위에 쌓인 각종 고지서가 나풀거리면 스마트뱅킹을 시작한다. 굳이 지금 꼭 해야 할까 싶지만 마무리해야 속이 시원한 일들. 그런데 어디부터 어떻게 글을 시작하려고 했지?


글이 안 써지는 원인이 비단 매일 짐을 싸고 푸는 일도, 너저분한 식탁만도 아닐진대, 내 공간의 부재로 결론 났던 어느 날, 안방을 집필실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올해 초 두 아들에게 각각 방을 분리해 줬고, 아이들 방에서 쫓겨난 가로 2미터의 책장이 처치 곤란인 채 안방 한가운데 바리케이드처럼 놓여 있었다. 안락한 수면을 위해 침대만 두기로 했던 안방에 책과 강의자료가 구석구석 탑을 쌓았고 침대 옆으로 작은 오솔길이 났다. 그렇게 지낸 게 5개월. 옷장과 협탁을 일단 거실로 밀어내고 벽 한쪽을 비웠다. 뒤통수만 흉물스럽게 보이던 책장을 돌려세워 벽에 붙였다. 아이가 쓰던 작은 책상을 그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오, 퍼펙트! 베란다 창고에 처박혀있던 작은 조명을 밝히고 앉았다. 세상에 이리 아늑할 수가.

    

새로 생긴 내 공간

이제는 한창 글을 쓰다가 몸만 쏙 빠져나와 밥을 하고, 부엌일을 마치고 내 의자에 사뿐 앉아 다시 자판 위에 손을 얹기만 하면 된다. 버퍼링 없이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바로 몰입할 수 있다니. 복도를 지나 안방이 눈에 보이는 순간, 가지런히 정리된 책이 날 부른다. 책상 앞에 앉으면 마음은 절로 거룩해진다. 그래, 이제 글을 쓸 차례야.     


바버라 애버크롬비는 <작가의 시작>에서 글을 쓰기 위한 에너지를 끌어모으기 위해 "자신만의 공간이나 책상, 탁자 등, 자신이 글 쓸 곳을 치우고 좋아하는 물건이나 사진을 놓아두어 그곳을 유혹적인 곳으로 만들라"라고 조언한다. 그건 영감을 유혹하는 일이라나.   


글 쓰러 들어가는 길


글쓰기 강의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이 집에 이사 오고 8년 만에 처음으로 내 책상이, 내 공간이 생겼다. 앞으로 글 쓸 일은 없을 거라 앉은뱅이책상 하나 살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입학하는 어린아이 마냥 새로 생긴 책상에 붙어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내 한 몸 쏙 들어가는 작은 책상엔 6인용 식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조금 바지런히 움직여 정리했으면 좀 좋아. 공간이 우리를 이토록 지배하는 것을. 잘 써보겠다는 의지만으로 되지 않을 때도 온다. 박약한 집중력을 원망하는 일은 이제 그만. 어수선한 집구석, 그보다 더 복잡했던 머릿속에서 억눌렸던 영감이 나올 차례다. 날아올라라,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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