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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26. 2021

내 영혼의 미역국

엄마는 맏며느리였다.

아들 형제 여섯만 있는 집안의 맏며느리. 나를 큰딸로 낳고 3년 터울의 여동생을 낳았을 때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들 낳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랬다. 엄마 마음속에는 '장손'을 낳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늘 남았나 보다. 외갓집 식구들이 나를 보고 "큰 애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아."라는 말을 할 때 엄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작은 엄마들이 생기고 작은집에 사촌 '남동생'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엄마의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엄마가 병원에 다녀오면 늘 누워있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체온을 쟀고 기도를 하셨다. 가끔 일이 잘 안 돼 유산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 집 밥상에는 미역국이 나왔다. 꽤 자주. 나와 열한 살 터울인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까지 미역국은 엄마의 병원행과 맞물려 내 기억에 자리했다.


https://www.sweetandsavorhie.com/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은 맛있었다.

비릿한 미역 냄새가 그대로 살아 밍밍한 국물을 떠도는 식당 미역국과는 달랐다. 엄마는 소고기를 덩어리째 삶아냈다. 미역을 물에 불려 참기름에 볶아내면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마치 곰국을 끓이듯 푹 미역을 고아냈다. 그 사이 식은 소고기를 손으로 잘찢고 양념을 해 두었다. 엄마에게 물어보고 한 번, 엄마 모르게 또 한 번. 방앗간을 오가는 참새처럼 부엌을 왔다 갔다 하며 고기를 집어먹었다. 오랜 시간 끓인 미역국과 위에 소복하게 얹어진 소고기 고명. 평소 처가 음식이 싱겁다며 힘들어하는 남편도 인정하는 최고의 미역국이다.


싱가포르에 갔을 때 유난히 미역국이 생각났다.

십여 년 전, 친구 결혼식에 초대받고 남편과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다시 신혼여행을 가는 듯 설렜다. 돌이 갓 넘은 큰아이는 시부모님께 맡겼다. 그런데 내 속이 좋지 않았다. 멀미하거나 여행 가서 물갈이하는 법이 없었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동남아 특유의 향신료 냄새도 코를 자극했다. 달달하고 칼칼한 칠리 크랩도 생각만큼 맛있지 않았다. 그저,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한식당을 찾았다.

남편은 촌스럽게 동남아 처음 온 티를 내냐며 못내 아쉬워했다. 미역국은 없었다. 대형 마트를 뒤져도, 푸드코트를 돌아도 그 흔한 미역국은 없었다. 3분 미역국, 그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빵빵 틀어대는 에어컨 바람에 뱃속까지 시려왔다. 뜨끈한 미역국 국물 한 숟가락만 먹으면 속이 녹아내리겠는데. 왜 하필 이때 초록빛 미역국 생각만 간절한 걸까.


일주일 여행 끝에 알게 된 사실, 둘째가 뱃속에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임신이었다. 그래서 그리 미역국이 당겼을까. 둘째 출산 후 석 달 동안 몸을 푼다고 내리 미역국을 먹었다. 첫째 낳고도 미역국을 달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물릴까 봐 소고기, 가리비, 가자미, 광어까지 넣어가며 미역국을 끓이셨다. 석 달 동안 행복했다. 어쩜 그리 질리지도 않는지 입에 착착 붙었다. 삼시세끼 미역국을 먹는 며느리를 보며 어머니는 혀를 내둘렀다.



공기가 쌀랑한 아침이면 미역국이 그리 당긴다.

말캉한 소고기와 보들보들 미역, 뜨끈한 국물. 밥 한 공기 말아서 후루룩 먹으면 오장육부가 노골노골 녹아내리는 것 같다. 어제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그리고 오늘 저녁까지 난 미역국을 먹었다. 내일도 먹으면 좋으련만 벌써 냄비 바닥이 보인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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