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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17. 2021

사춘기 아들이 엄마에게 한 부탁

"혼내실 때 빈정거리는 말 기분 나빠요"

엄마, 저 부탁이 있어요.

ㅡ어. 말해봐.

제게 뭔가 설명해주실 때 지금처럼 부드럽게 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제 PPT 작업 잘못했다고 말씀하실 때 잔소리 같았어요. 제가 잘못한 건 알지만 좀 무서웠어요.

ㅡ그래.. 미안해. 엄마 스스로도 목청 높아진다고 느꼈어. 엄마가 침착해지도록 노력할게.

네. 그리고, 엄마가 저 혼낼 때 빈정거리는 말도 들으면 기분 나빠요.

ㅡ(끄응....) 아, 알겠어. 고칠게. 어제는 미안했어, 아들.


내겐 흥분하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버릇이 있다.

상황이 못 마땅하거나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면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따박따박 논리를 따져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난 옳고, 넌 틀려!'라는 생각에 함몰되는 결과다. 듣는 이들은 내가 분노를 쏟아내는 느낌이란다. 그 상대는 주로 남편과 아이들. 나를 아내와 엄마로 둔 죄다.


"쥐 잡듯 쏘아붙이는 당신과 이야기하다 보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아. 특히, 아이들한테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당신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순간, 애들이 바짝 움츠러들어. 그거 알아?"

무안했지만 인정했다. 팩트였으니까. 세 남자에게 많이 미안했다. 특히 두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이야 나와 비교적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못 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지만, 가장 무서운 엄마기도 하니 불편한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을 거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주 혼동하는 것 하나가 '혼냄'과 '화냄'이다.

분명 아이의 잘못을 바로 잡겠다고 혼내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아이들에게 화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이것이 분명 구분돼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감히 엄마를 힘들게 해?'라는 생각에 미치면 훈육이 분노로 변질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엄마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내 감정의 총알받이까지 될 이유는 없다.

그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부모라는 권위를 오용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화내는 엄마를 보며 어린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앞으로 고쳐야겠다고 반성할까? 얼굴 시뻘게 져서 소리를 지르는 엄마를 보며 무섭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결과적으로 아이 머릿속에는 분노 가득한 엄마의 표정만 남아있을 게다. 무엇인가 해 보고 싶어도 또 혼날까 두려워 위축되고 눈치 보는 습관만 자라게 될 뿐이다. 엄마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운다고 애쓴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훈계'를 가장하여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낸다는 걸 아이들은 어려도 다 안다.





https://pixabay.com




어느 날, 자기 전 아이들에게 잠자리 기도를 해주면서 사과하기로 했다.

"엄마가 너희들이 잘못했을 때 바로 잡는다고 하면서 화낸 거 미안해. 옳은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아들들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어."

"아녜요, 엄마. 우리가 잘못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엄마가 화낸 건 잘못한 거야. 잘못한 걸 혼낼 수는 있지만 버럭버럭 화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어렵사리 용서의 말을 꺼낸 엄마에게 큰 아이가 말한다.

"엄마가 그러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혼나서 기분 나빴다는 건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곁에 가만히 누워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엄마를 꼭 안아주는 아들. 눈물이 핑 돈다.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엄마를 위로하고자 하는 말일까. 어쩌면 내게 받은 상처는 무의식에 자리 잡아 아이 스스로도 인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마음이 넓었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말이다.


https://pxhere.com/ko/photo/154038


큰 아이는 중학생이 됐다.

세상이 말하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지만 스스로 행복해서 아직은 사춘기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밝고 건강하다. 하지만 워낙 엄한 부모 아래 자란 첫째 아이인지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내비치지 않는다. 어미지만 아이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 아이의 머릿속에는 우주가 펼쳐져 있을 게다. 작은 일에 복닥거리는 엄마를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우주 말이다. 큰 아이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엄마가 오해와 억측으로 과하게 자신을 혼낸다고 생각해도 일단 묵묵히 듣곤 한다. 그리고 내게 슬쩍 말한다. "엄마, 사실 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제가 '손을 들라'라고 말한 날도 그랬다.

사실 별 것 아니었는데 아이를 많이 혼내다.... 화를 냈다. 아이가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당신, 좀 과했어. 애가 밥 먹는 내내 고개를 안 들잖아."

남편이  슬쩍 말하는데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심했다는 것을. 아이가 속상해 밥 먹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음 날, 아이와 단 둘이 차를 타고 가면서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엄마가 어제 미안했어. 또 목소리가 커졌어. 사과할게, 아들."

"네, 엄마."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이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힌다. 속상했구나.

"앞으로 엄마가 목소리가 커져서 무섭게 혼낸다 싶을 때는 손을 살짝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엄마가 '아, 내가 지금 흥분했구나.' 깨닫고 멈추도록 노력할게."

"진짜 그래도 돼요?"

"그럼! 엄마도 가끔 스스로 심하다고 느껴도 한창 말하다 보면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어. 그때는 아들이 엄마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알겠어요."

비로소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돈다.


큰 아이는 어려서 유난히 엄마를 찾았다.

분리불안에 시달리며 이른 아침마다 엄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회사 가지 말라고 울곤 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퇴근해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면 "엄마, 언제 나와요?" 하며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던 녀석이다. 키가 훌쩍 자라 이제는 엄마를 내려다본다. 어릴 적 해사한 아이의 얼굴이 가끔은 너무나 먼 기억이 된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저려오곤 한다. 부족한 엄마로 인해 아들이 상처 받고 힘들었던 게 왜 없었을까?


이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이와 함께 성장한 엄마로서 과거 행한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기다리고, 그저 품고 또 품어 아이가 구김 없이 행복하게 자라기를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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