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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22. 2021

그는 '곰소의 의인'이 됐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다. 여행의 묘미는 그 지역 맛집을 찾아 즐기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는 남편 덕이다.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남편은 검색 능력마저 겸비해서 진짜 맛집을 기차게 찾아낸다. 여행지의 맛집은 여러 종류가 있다. 한 번 왔다 사라지는 '뜨내기' 관광객이 몰리는 곳과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잔뼈 굵은 곳, 최근 음식 트렌드에 따라 핫하게 등장해 SNS를 달구는 곳과 볼품없고 허름하지만 동네 주민의 사랑방 같은 곳. 남편은 주로 후자를 골라내 먼 길마다하지 않고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 가족의 여행 동선은 철저히 먹방 투어로 짜여 있다.


전북 부안을 찾았을 때도 그러했다. 아침으로 백합죽을 든든히 먹었고 점심에는 젓갈 정식과 갈치조림으로 밥을 각 두 그릇 싹싹 비웠다. 넷이 앉은 밥상에는 밥공기 여덟 개가 쌓였다. 바로 이어 소금 커피와 찐빵까지 간식으로 챙겨 먹었다. 예정된 동선에 있던 식당 한 곳이 문을 닫아 이제 저녁식사만 먹으면 됐다.



저녁 메뉴는 회였다. 철 지난 바닷가도, 이른 저녁 횟집도 한적했다. 회를 시키자 한 상 가득 '스끼다시'가 차려졌다. 낙지 탕탕, 개불, 가리비, 전복, 관자, 소라, 전어, 가오리, 멍게, 백합, 새우, 게 등 순수 해산물로 차려진 화려한 상차림에 두 아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횟집의 단골 반찬 '콘치즈'가 나왔지만 이때만큼 초라하고 인기 없기도 처음이었다.



메인 메뉴, 우럭이 나오기도 전에 배는 이미 불러오기 시작했다. 난 일찌감치 백기를 들고 가만히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아이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많은 회를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대식가인 남편도, 먹성만큼은 야구선수 부럽지 않은 둘째도 어느 순간 슬슬 젓가락을 내려놨다.  


해산물 킬러인 큰아들은 쉬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면 늘 '회', '해산물'을 말하는 녀석. 최애 메뉴가 펼쳐진 그곳에서 큰아들은 탄성을 질렀다. 철저히 가성비를 따지는 엄마, 아빠는 평소 인심이 후하지 못하다. 수도권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아들이 원할 때마다 원하는 만큼 먹이려면 두둑한 지갑과 바다 같은 배포가 필요하다. 큰아들은 행복했다. 남은 '스끼다시'가 아깝다며 끝까지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했다. 마지막 매운탕 국물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맛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차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둘째가 소리를 쳤다.


아, 형아! 엄마, 형아가...



과하게 먹었다 싶은 큰아이가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아이들은 어렸을 때도 차 안에서 실례를 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 큰 중학생 녀석이 뿜어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남편도, 나도 어쩔 줄 몰라 소리 질렀다. "야, 차 안에서 이러면 어떡해!" 그때 둘째가 형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형아, 내가 이렇게 받치고 있을게.
어서 차 밖으로 나가!



밖은 비가 내렸다. 자세히 서술하기 어려울 만큼 이후 상황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속이 뒤집힌 큰아이도, 차에 진동하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던 남편과 나도 빗 속에서 황망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다만 둘째만 이리저리 재빠르게 뛰어다니더니 횟집에서 물티슈를 한 주먹 가지고 왔다. 비를 쫄딱 맞은 채.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어렵게 상황을 수습하고 빗속을 달렸다. 인적이 드문 숲길은 가로등 하나 없었다.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을씨년스러운 밤, 거세게 내리는 가을비를 뚫고 하이빔을 쏘아가며 차는 달렸다. 차 속은 고요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내 머릿속은 카시트와 매트를 어떻게 닦아내야 하나, 꼬릿한 냄새를 어찌 빼야 하나,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적막 속에 남편이 입을 열었다. "둘째, 어떻게 그렇게 형을 도와줄 생각을 했어? 더러워서 싫었을 텐데."


형아잖아요. 난 형아가 더 심하게 아파도 끝까지 돌봐줄 거예요.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열세 살 된 녀석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당황하고 불쾌한 마음에 큰 소리를 내버린 남편과 나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미안해 입을 다물고 있던 큰 아이가 나지막이 답했다. "고마워."


난 어려서부터 내 몸 힘든 게 싫었고 냄새나고 더러운 건 더 싫었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게 화장실 청소고, 집 밖을 나가면 지금도 화장실을 잘 가지 못한다. 이런 나를 두고 친정엄마는 '까시러졌다'고 못마땅해했다. 큰아이의 예기치 않은 상황을 보고도 '저걸 어쩌나' 눈앞이 캄캄했다. 어미인 나도 이런데, 어린 녀석이 어떻게 오물을 맨손으로 받아낼 생각을 했을까. 그건 머리로 생각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찰나, 0.1초의 순간 아이의 손은 형을 향했고 아무 저항 없이 토사물을 받았다. 형이 아파서 불쌍하다며 화장실을 찾아 나선 것도 둘째였다.


이후 여행 내내 카시트를 닦고 냄새를 빼느라 우리는 애를 먹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큰아이를 탓하지 않았다. 아니, 탓할 수 없었다. 가장 어린 녀석이 형아가 더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냄새가 역하다고 타박할 수 없었다. 사실 우리집에서 냄새에 가장 민감한 건 바로 둘째였다.


"그런데 엄마, 형아 이제 밥 못 먹어요?"

"어. 형아는 죽만 먹어."

"헉. 내일 피순대국밥 먹으러 가는데... 형아 불쌍하다."


두 아들 @채석강, 변산반도


그날 이후 우리는 둘째를 '곰소의 의인'이라고 부른다. 사달 일어난 곳이 염전으로 유명한 '곰소'였다.

"막내, 기특해. 엄마는 네가 참 멋있다."

둘째가 씩 웃는다.

"옛다, 곰소의 의인은 맛있는 거 더 먹어!"

그 사건이 떠오를 때마다 민망한 큰아이는 둘째에게 넌지시 간식을 양보한다. 

"고마워, 형아! 네가 곰소의 의인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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