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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Nov 14. 2021

초등 6학년의 어휘력 현주소

아들아, 아는 단어가 이리 부족하면

가을이 여무는 들판은 노랗다. 눈을 멀리 뻗어도 사방팔방 너른 평야.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라는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니. 마치 외국에 온 듯, 저 멀리 지평선 끝, 하얀 구름 아래 야트막한 구릉이 희미하다.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 만경강과 동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 여행길에 만난 김제평야는 오래전 알고 지낸 친구 이름 같이 반갑다.


"아들, 봐봐. 산이 없어. 평야가 엄청 넓지?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야." 차창 밖 풍경에 매료돼 읊조리는 내게 둘째 아들이 묻는다.

"곱창 지대? 여기 곱창이 유명해요?" 

아, 곱창.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곡창을 곱창으로 듣다니. 큰아들이 동생을 나무랐다. "야, 곱창이 아니라 곡창! 좀 먹지만 말고 배워라." "난 곱창인 줄 알았지. 며칠 전부터 곱창이 먹고 싶었는데. 근데 곡창은 뭐야?"


둘째의 동문서답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손흥민은 군계일학이지"라고 말하면 "공개희락?"이라고 되묻고 "형은 박학다식하잖아"라면 "박학대식? 대식가? 형이 좀 많이 먹지"라고 제 멋대로 해석한다. 볼 일 보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나를 두고 이렇게도 말했단다.

"아빠, 엄마가 장 보고 오신다더니 무감무식이네요?"

"무감무식? 그런 말도 있어?"

"왜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하잖아요. 무감무식."

"아, 감감무소식! 그건 감감무소식인 거지. 으이구."


오가는 대화 속에서 둘째가 날리는 헛소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처음에는 웃고 넘어갔는데 어느 날 남편이 심각하게 아이의 청력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병원을 가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결론 내렸다. 청력 문제는 아닌 것으로. 대화 맥락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아들의 어휘력은 심히 짧았다.


전북 부안을 향해 세 시간은 달렸을까. 액셀을 밟아 내달릴수록 바다 냄새가 난다. 보일 듯 말 듯, 바다는 쉽게 제 모습을 내주지 않는다. 둘째 아들이 이정표를 보더니 묻는다.

"새만, 금방, 조제? 저게 뭐래요?"

새만 금방 조제? 난생처음 들어본 말에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도 고개가 갸우뚱했다. "어디서 본 말인데? 어디 쓰여 있어?" 뒷자리에서 둘째 손가락이 쭉 삐져나왔다. 손가락 끝엔 이정표가 있었다.

'새만금방조제'


아뿔싸.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도 아니고. 남편과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어찌 그리 읽을 수 있을까. 잠에서 깬 큰아들이 이번에도 둘째를 타일렀다. "교과서에서 안 배웠냐? 새만금 방조제. 바다를 막아서 간척지를 만든 곳. 몰라?"


바로 요 녀석 @ 채석강


상식을 벗어난 둘째의 어휘는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우리말인데 어찌 저리 해석할 수 있는지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다. 한자를 따로 배우지 않은 터라 사자성어가 나오면 기가 막힌 조어 능력을 보여준다. 내 키만큼 자란 초등학교 6학년의 단어 수준이 이리도 떨어져서 어찌할지, 내년 중학교 공부는 제대로 할지 의문스럽다. 중학생 큰아이가 제 동생에게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쏟아놓는다. "너 그렇게 해서 사회 시간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책 좀 읽어!"


저녁이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녀석. 내용은 알고 읽을까 싶어서 옆에서 거들라치면 손사래를 친다. "엄마, 제가 알아서 읽어요." 세상 하나뿐인 희귀 단어를 쏟아놓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책에 집중한다. "아, 재미있다!" 가끔씩 탄성도 터진다. 그래, 저러면서 어휘력도 나아지겠지. 엉뚱 발랄 어록도 머지않아 끝나리라.


둘째는  오늘도 어록을 하나 남겼다. "여보, 어제 결국 누군가 국장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남편이 내게 건넨 말을 듣고 둘째가 묻는다.

"영미? 국장이 영미 했다고요? 영미! 여기로, 영미!"

갑자기 차 안에선 때 아닌 컬링 경기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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