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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an 28. 2022

영어 까막눈, 3년 만에 연설하다

"When I see the principal, Mr. Youn who always greets us in front of the school every morning, I can see how much he loves us.
(매일 아침 학교 앞에서 우리를 늘 맞아주시는 교장선생님을 볼 때, 선생님이 우릴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열세 살 '우리집 리트리버', 둘째가 초등 수료를 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고등과정까지 있는 대안학교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친 후 학교를 온전히 떠날 때를 제외하고 초등과 중등은 '졸업' 대신 '수료'라는 표현을 쓴다. 수료식 날, 해당 아이들은 모두 연설을 한다. 둘째도 한 달 전부터 A4 한 장 가득 원고를 준비해서 수료 연설을 했다.  그것도 영어로.


학교를 옮길 때 둘째는 열한 살, 4학년이었다. 영어실력이라곤 이전 동네 초등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들은 방과 후 수업이 전부. 물론 두 살 터울인 형과 함께 매일 성경구절을 영어로 듣고 암송했다. 뭘 알아서 외웠겠는가. 그저 형이 한다니 따라 했고 그게 영어를 접한 것의 전부였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학교는 초등 교과과정의 60%를 영어로 수업한다. 4학년부터는 입학 캠프 때 영어 에세이를 써야 한다. 아이가 수업을 얼마나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알파벳 'b'와 'd'도 구분하지 못하는 영어 까막눈에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문제만이라도 읽으라고 뒤늦게 파닉스 책을 사다가 아이와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작 한 달간 우리가 한 건 알파벳을 소리 내서 읽는 것. 아이는 'b'가 나올 때마다 왼손 엄지와 검지를 말아쥐었고, 'd'가 등장하면 오른손을 사용해 동일한 방법으로 'd'를 만들었다. 이런 아이에게 뭔가 문장을 쓰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아들,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그림을 그려!" 


'b' 그리고 'd'


영어 실력이 입학을 결정한다면 둘째는 보나 마나 불합격이었다. 우리가 아이를 그 학교에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대학 입시 때문이 아니었다. 학교의 설립 취지 역시 엘리트 교육이 아니었기에 학교가 아이를 평가하는 건 다른 부분일 거라 믿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배우고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학교이니, 아이가 뭔가 해보려는 의지만 보인다면 학교는 아이의 잠재력을 읽어주리라 믿었다. 어미의 걱정과 달리, 아이는 모의 수업을 신나게 즐겼다. 영어 시험지 위에 알파벳을 제 멋대로 조합하고 나온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그리고 당당히 합격했다.


그랬던 녀석이 6학년 수료 연설을 영어로 한다니 슬쩍 걱정이 밀려왔다. 가끔 도움이 필요한지 넌지시 물으면 아이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제가 알아서 해요." 글 쓰는 엄마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할까 신경 쓰였던지 모든 걸 비밀에 부쳤다. 물론 아이는 구글 번역기를 활용하는 꾀를 냈고, 원어민 선생님은 바로 잡아주는 수고를 했다. 둘째는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다른 부모들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수료식 날, 아들의 연설은 어미 눈에 그저 완벽했다. 3년 전, 'b'와 'd'가 헷갈려 두 손을 배트맨처럼 말아 쥐던 녀석이, 영어로 된 과학교과서 한쪽을 읽기 위해 2시간을 끙끙거리던 녀석이 2분간 거침없이 영어로 감사를 표했다. 물론 영어 특유의 위트를 가득 담아 원고를 작성한 아이들도 있었고, 유창한 발음으로 손짓을 해가며 스피치를 하는 원어민 같은 아이도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둘째의 연설은 초라할지 모르나, 나와 남편은 그저 감격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20만원 어치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둘째의 영어 수료 연설 원고


둘째는 영민하고 예민한 형 아래서 무던하게 자랐다. 세 살이 되도록 머리숱이 없어 어른들 걱정을 샀고, 밥을 입에 물면 도통 씹지를 않아 빼빼 말랐다. 늘 작았고 조용했다. 그러다가도 "얘는 왜 때가 됐는데 뒤집지도 않지?"라고 한 마디 하면 그 다음날 몸을 발랑 뒤집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늘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며 노는 것 같아서 "숙제했냐", "시험공부했냐" 물으면 이미 모든 걸 끝냈다며 꼭 이렇게 말한다. "엄마, 제가 다 알아서 해요."


이제 둘째의 어깨는 옷가게 직원이 놀랄 만큼 벌어졌고 허벅지는 우리집에서 가장 굵다. 변성기 탓에 산적 같은 목소리로 꽥꽥거리지만 어미 에는 코맹맹이 애교스러운 어투만 들린다. 여전히 해맑은 미소는 사랑스럽다. 세상 어디에 갖다 두어도 행복할 것 같은 녀석,  인생이 그저 달달하다는 녀석. 잘 자라줘서 참 고마운데,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품에 쏙 들어왔던 다섯 살 둘째의 여리여리한 몸을 난 아직도 기억하는데, 아이는 이제 중학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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