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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Feb 18. 2022

사춘기 아들과 재미있게 지내는 법

힘든 건 한 때다

"햄버거? 칼국수? 아니면 콩나물 국밥?"

"난 마라탕이 땡기는데. 엄마, 우리 마라탕 먹으러 가자요!"


매일 점심이면 두 아들은  꽤 심각해진다. 정오가 되기 전부터, 아니 아침을 먹은 지 불과 몇 분 되지 않아 다음 끼니를 생각한다. 세상에 먹을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밥때가 왜 하루 세 번뿐인지 의아한 두 녀석들. 뱃속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춘기 두 아들은 먹고 돌아서면 잠시 후 또 배고프다. 아직 겨울방학중인 아이들은 집에서  먹고 먹고 또 먹는다.


"그만 좀 먹자!"라고 호통을 쳐도, 이미 밥 두 그릇 먹은 걸 상기시켜도 결국 소용없다는 걸 난 안다. 우린 밥을 거하게 먹고 난 후 햄버거 가게 앞에서 멈춰 설 것이고, 빵집에서 한 꾸러미의 빵을 살 것이다. 이날도 아이들은 마라탕을 곱빼기 수준으로 먹고, 입가심으로 햄버거 하나씩 해치운 후 귀가했다.


© Eiliv-Sonas Aceron , 출처 Unsplash


아들만 둘이라고 하면 가끔 날 불쌍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딸이 없어서 어떻게 하냐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하는 이들. 진심 위로를 하려는 건지, 날 놀려먹는 건지 가끔 헷갈리지만 상관없다. 비록 아들이 생활비를 위협할 만큼 밥을 많이 그렇다고 난 그들의 생각만큼 불쌍하지도 외롭지도 않다.

  

사춘기 아들 둘과 지내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다. '사춘기', '아들', '둘'이라는 세 가지 조합이 마냥 쉬운 것도 늘 좋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아이들은 말귀를 알아듣는다. 내 말에 적절한 반응을 해주고 엄마 표정을 읽어낸다. 프렌치프라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는 내 말에 기꺼이 "콜!"을 외치고, 쌉싸름한 커피를 원하는 엄마를 위해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고 함께 카페에도 가 준다. 밥에는 엄격하나 디저트에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는 고칼로리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죄책감 하나 들지 않는다. "엄마, 괜찮아요.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공범인 두 아들은 그래서 늘 든든하다.


분리불안을 호소하는 큰아이가 다섯 살 때, 난 육아휴직을 하고 그다음 해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 둘을 2년 터울로 낳고 키우는 일은 더없이 힘들었다. 열심히 공부해 들어간 대학에선 일하면서도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워킹맘으로 정신줄 놓고 살았던 5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몸도 마음도 메말랐던, 내 인생의 어두운 터널과 같던 시절이다.


당시 나를 암담하게 했던 건 아이를 키우는 게 평생 고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뭐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더 외롭고 괴로운 시간. 이것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어미라는 이름의 인생은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소한 일에도 버럭 성을 내고 짜증내기 일쑤였다.


"그때가 좋을 때야. 시간 금방 간다. 애들 커 봐. 다 지들 좋다고 나가 돌지. 자식도 품 안에 있을 때 자식이야." 이미 아이들을 다 키운 '형님급' 엄마들은 두 아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초췌해진 내게 이리 말하곤 했다. 얄밉기 그지없었다. 애 키우는 건 다 그렇게 힘든 거라고, 그 정도는 다 하는 거라고, 마치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마냥 그들은 조언했지만 한창 혈투 중인 젊은 엄마에게 그런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뺨이 쏙 들어갈 만큼 내 얼굴은 나날이 수척해졌다. 잠 못 자게 날 깨우는 녀석들이 원망스러웠고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미웠다.


이제야, 감히 조금, 아주 조금 깨닫는다. 꼬물꼬물 녀석들이 기저귀에 똥 쌀 때, 내 품에 꼭 안고 밤새 씨름할 때가 좋았다는 것을. 그립다. 내 손을 꼭 잡고 놓을 줄 모르던 보드라운 손길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온 집안을 뛰어다니던 녀석들의 혀 짧은 괴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힘들었지만 다시 내게 그 시간이 허락된다면. 요즘 들어 자주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출처 Unsplash


이제 아이들은 알아서 제 몸을 닦고 옷을 입고 할 일을 한다. 집안일은 돕느라 설거지, 빨래, 청소를 한다. 내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이면 살금살금 다가와 귀에 속삭인다. "엄마, 라면 끓여들일까요?" 내 취향을 기가 막히게 아는 둘째는 계란까지 반숙으로 익힌 라면을 대령하고 버터 잔뜩 발라 구운 토스트도 내어놓는다.

 

 "엄마는 까다로운 게 매력이에요."

"엄마, 추운데 문 쪽엔 제가 앉을게요"

"짐은 제가 들게요. 엄마 허리도 아픈데..." 

엄마를 생각하는 두 아들의 살뜰한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달달해진다. 아들 둘을 온몸으로 키우느라 힘든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온 몸의 에너지를 쥐어짜야 하는 시기는 인생 중 극히 일부라는 걸 누가 얘기해줬으면 좋았으련만.


내게 두 아들은 어느 딸들 못지않게 사랑스럽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 때면 청소년 썩은 냄새가 진동하지만 눈곱 낀 얼굴로 날 꼭 안아주면 그리 행복할 수가 없다. 그때 조금 더 잘해줄 걸.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아이들에게 모질게 했던 기억만은 시시때때로 불쑥 올라와 계획에도 없던 말을 하게 한다.

"얘들아, 우리 돈가스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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