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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Dec 12. 2021

왜 하필 결혼기념일에 김장을

얘, 낼모레 김장할 거니까 와라.



 우리집 외며느리다. 김장 때마다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기꺼이 돕고자 미리 연락을 드리면 어머니는 늘 말한다. "배추 오는 거 보고 내 전화하마." 그 전화는 꼭 11월 말에 온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의 결혼기념일과 겹친다.


시어머니는 평생 일복을 달고 살았다. 막내며느리였지만 층층시하 시누이들 아래, 외며느리와 다를 것 없는 시집살이를 했다. 시할머니는 매서웠다. 여리고 고운 며느리에게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박박 씻어 추어탕을 끓이라고 했고, 임신한 배를 안고 이불 빨래를 하게 했다. 시집오고 첫 성묫길에선 진흙탕에 발이 빠져 버선발이 엉망이 됐지만 누구 하나 수줍은 새댁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시할머니 흉을 보며 한탄하곤 했다. "아이고, 느그 할머니 어찌나 못 됐던지 아나?"


하지만 모진 시집살이를 자신의 며느리에게 물려주진 않았다. 결혼 후 시골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내려갔을 때 고운 한복을 입고 꽃신 신은 나를 귀히 챙겼다. 흙밭에 행여 발이 빠질세라 운전하는 아버님께 최대한 집 가까이 주차를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진흙이 잔뜩 묻은 발로 힘겨웠던 수십 년 전 이야기를 어머니는 그날, 갓 결혼한 며느리에게 들려줬다. 변변한 반찬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나를 혼내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내가 큰아이를 낳고 몸조리할 때도 어머니는 매일 우리집에 와서 곰솥 가득 미역국을 끓여주셨고, 결혼 후 맞이한 첫 생일 땐 출근한 며느리를 위해 생일상을 차려두고 가셨다. 


김장도 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는 모든 재료 준비를 다 마친 후에 며느리를 불렀다. 다만 연락 오는 시간은 제각각이어서 이르면 김장하기 일주일 전, 급하게는 전날 오후 갑자기 내게 연락해 본가로 건너오라 했다. 


© allybally4b, 출처 Pixabay


갑작스러운 호출은 모두 다 절임배추 탓이었다. 김장철의 절대 갑은 절임배추 장사다. 예약한 날짜 따윈 없다. 그쪽 사정에 따라 절임배추를 발송하면 그날이 김장날이다. 절임배추를 받으면 바로 김장을 해야 한다. 낮동안 받으면 그나마 며느리를 부르지만 해가 내려앉은 늦은 저녁 배추를 받는 날이면 어머니는 새벽 내내 홀로 두 집 김장을 다 해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부서질 듯한 요통을 견디지 않고도 '정당하게' 김치를 받을 수 있어 더없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하지만 며칠 끙끙 앓아누울 어머니를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가 없다.


몇 해 전 남편과 난 결혼기념일을 즐기려 고가의 뮤지컬 티켓을 예매했다. "여보, 어머님이 또 결혼기념일에 김장하라고 부르시는 거 아닐까?" "설마, 엊그제 연락드렸을 때 별 말씀 없으셨잖아. 이번엔 지나서 하시겠지." 남편의 말대로 되리라 기꺼이 믿고 여동생을 긴히 불러 두 아들을 맡겼다. 들뜬 마음으로 오랜만에 옷을 차려 입었다. 뾰족구두를 신으려는 찰나,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배추 왔다. 건너 와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던가. 뮤지컬 티켓은 여동생에게 건넸고 난 남편과 아이들을 대동해 시댁으로 넘어갔다.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채. 


그날 이후 결혼기념일은 포기했다. 처음엔 결혼기념일에 꼭 김장을 하는 시어머니가 야속했지만 어쩌랴. 배추가 그때 오신다는데. 무엇보다 어머니는 아들 며느리 결혼기념일을 방해하는 걸 미안해했다. 의도적으로 김장날을 그날로 맞추는 게 아니라는 걸 안 이상, 화를 낼 수도 없다. 


올해는 다행히 결혼기념일이 평일이었고, 어머니는 절임배추를 주문하지 않았다. 다만, 손 빠른 어머니는 주말 도로 정체 속에 늦게 도착한 며느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댁에 도착하니 배추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얕은 한숨만 쉴 뿐 싫은 소리도 않는다. 몸 둘 바 모르는 며느리는 뒤늦게 고무장갑을 꺼내 들고 김치통에 김치를 가지런히 담는다. 무릎을 조아리며 여기저기 주방 바닥에 튄 양념을 빠른 속도로 닦는다. 어머니 손이 물에 닿기 전에 그릇이 나오는 대로 설거지도 냉큼 한다. 


올해는 텃밭에서 배추 15포기를 수확한 아버님 덕에 어머님은 배추 절이는 일까지 홀로 했다. "며늘아, 배추 봤나? 기가 막히다. 입에서 아주 살살 녹는다." 언제나 말씀만으로 김장도 하고 요리도 하는 아버님. 어쩜 농사까지 그리 기가 막히게 잘 지으시는지 배추 자랑이 끝이 없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아픈 어머니는 아버님이 그저 못마땅하다.


어머니, 이제부터는 김치 사 먹어요.


몇 달 전,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남편이 김장김치를 사 드리겠다고 했다. 일흔 해 넘도록 김치를 담근 시어머니는 이제 김장에서 해방될 때가 됐다. 이놈의 며느리는 홀로 김장할 능력이 못 된다. 등이 굽어가는 시어머니에게 남편과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대한민국 최고의 김치를 찾아 보내드리는 일이다. "얘, 니 그때 보내준 김치 말이야. 그게 처음엔 괜찮더니 두고 먹으니까 그 맛이 안 나더라." 


아, 내년엔 우리 부부의 바람처럼 김장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과연 그게 가능해지려나. 내년에 아버님이 배추씨를 뿌리지 않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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