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 첫째는 이 말을 달고 산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걸 수백 번 경험했지만 매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역시나' 눈앞에 바로 등장하지 않는 아들을 향해 소리친다. "아직 멀었니?"
아이에게 곧 끝난다는 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이것만 하면 된다는 건 마무리하는데 앞으로 30분은 더 걸린다는 뜻이다. 본인은 절대 급하지 않다. 나름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다.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의 속도와 맞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지금 당장 현관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고, 배차시간이 30분인 버스를 놓치지 않게 서둘러야 한다. 허나, 그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온화한 표정을 짓고 기다란 다리를 휘적거리며 여유롭게 집 안을 돌아다닌다.
첫째는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하다. 어려서부터 100번 이야기를 하면 101번째 꼭 똑같은 행동을 했다. 분명히 "네, 엄마. 알겠어요."라고 답을 했는데 도무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다. 나중에 심각하게 정색하고 물으면 자신은 그게 왜 문제인지, 왜 고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으, 진작 말할 것이지! 다 알아들은 줄로만 안 어미는 뒤통수 맞은 기분에 분노한다. 그때부터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쏟아내면 아이는 잔뜩 움츠러들며 말한다. "엄마, 죄송해요."
아이의 사과를 들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엄마의 기세에 눌려 아이가 솔직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것 같아 난 돌아서서 후회와 반성을 쏟아내곤 했다. 내가 102번 말하면 되었던 것을. 알았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잘하겠지. 며칠 뒤, 아이는 내가 저녁상을 다 차린 후 "밥 먹자"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가 10분을 머물렀고, 샤워 후 다 쓴 수건을 바닥에 두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 이를 어째쓰까나.
요즘도 아들은 잊을만하면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돼서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느지막이 설렁설렁 걸어 나온다. 출근 정체가 극심한 월요일,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데도 교복 셔츠 단추를 잠근다고 수 분째 꼼지락꼼지락거린다. 사색과 식사를 동시에 즐기는 아들을 위해 우리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분께서 식사를 마치실 때까지 기다린다. 모두가 잠든 시간, 오밤중에 정수기를 '또르르' 틀어 비타민과 칼슘을 먹고 이를 닦고 볼 일을 보고 나서야 불을 끄는 녀석. "이제 잘게요."라고 말한 뒤 실제 잠자리에 들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30분. 화장실에 꿀단지를 숨겨놨는지 샤워하러 들어가서 1시간이 넘어야 나오는 아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뭘 하냐?""거울도 좀 보고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제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도 하고 그래요. 엄마, 기다렸어요?"
달리 보면, 큰 아이는 멘털이 강하다. 자기 주관도 뚜렷하다. 옆에서 빽빽거리고 떠들어도 한 번 꽂힌 책에선 눈을 뗄 줄 모른다. 엄마 아빠한테 잔뜩 혼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변성기 특유의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기타를 튕기며 노래 부른다. 남이 보면 그저 훌륭한 아들이다. 그들은 모른다. 한 집에 사는 어미의 어려움을. 내 마음에 쏙 드는 아들 대신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하도록 진정 마음을 내려놔야 하는 것인가. 철저히 평범한 어미로 아들을 비범하게 키우기 위해선 더 많은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인가.
얼마 전, 아들은 학교에서 한 적성검사 결과를 말해줬다. "엄마, 자존감이 10점 만점에 10점이 나왔어요. 그런데 공감능력은 4점이래요. 제일 낮더라고요. 내가 공감을 그렇게 잘 못하나?"
아, 남편과 나는 서로 바라보며 탄식했다. 우리가 마냥 잘못된 건 아니었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