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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y 24. 2022

느려도 너무 느린 사춘기 그분

평범한 엄마의 비범한 아들

곧 끝나요. 이것만 하면 돼요.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 첫째는 이 말을 달고 산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걸 수백 번 경험했지만 매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역시나' 눈앞에 바로 등장하지 않는 아들을 향해 소리친다. "아직 멀었니?"


아이에게 곧 끝난다는 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이것만 하면 된다는 건 마무리하는데 앞으로 30분은 더 걸린다는 뜻이다. 본인은 절대 급하지 않다. 나름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다.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의 속도와 맞지 않는다는 . 우리는 지금 당장 현관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고, 배차시간이 30분인 버스를 놓치지 않게 서둘러야 한다. 허나, 그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온화한 표정을 짓고 기다란 다리를 휘적거리며 여유롭게 집 안을 돌아다닌다.


첫째는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하다. 어려서부터 100번 이야기를 하면 101번째 꼭 똑같은 행동을 했다. 분명히 "네, 엄마. 알겠어요."라고 답을 했는데 도무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다. 나중에 심각하게 정색하고 물으면 자신은 그게 왜 문제인지, 왜 고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으, 진작 말할 것이지!  다 알아들은 줄로만 안 어미는 뒤통수 맞은 기분에 분노한다. 그때부터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쏟아내면 아이는 잔뜩 움츠러들며 말한다. "엄마, 죄송해요." 


아이의 사과를 들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엄마의 기세에 눌려 아이가 솔직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것 같아 난 돌아서서 후회와 반성을 쏟아내곤 했다. 내가 102번 말하면 되었던 것을. 알았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잘하겠지. 며칠 뒤, 아이는 내가 저녁상을 다 차린 후 "밥 먹자"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가 10분을 머물렀고, 샤워 후 다 쓴 수건을 바닥에 두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 이를 어째쓰까나.


요즘도 아들은 잊을만하면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돼서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느지막이 설렁설렁 걸어 나온다. 출근 정체가 극심한 월요일,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데도 교복 셔츠 단추를 잠근다고 수 분째 꼼지락꼼지락거린다. 사색과 식사를 동시에 즐기는 아들을 위해 우리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분께서 식사를 마치실 때까지 기다린다. 모두가 잠든 시간, 오밤중에 정수기를 '또르르' 틀어 비타민과 칼슘을 먹고 이를 닦고 볼 일을 보고 나서야 불을 끄는 녀석. "이제 잘게요."라고 말한 뒤 실제 잠자리에 들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30분. 화장실에 꿀단지를 숨겨놨는지 샤워하러 들어가서 1시간이 넘어야 나오는 아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뭘 하냐?" "거울도 좀 보고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제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도 하고 그래요. 엄마, 기다렸어요?"



달리 보면, 큰 아이는 멘털이 강하다. 자기 주관도 뚜렷하다. 옆에서 빽빽거리고 떠들어도 한 번 꽂힌 책에선 눈을 뗄 줄 모른다. 엄마 아빠한테 잔뜩 혼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변성기 특유의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기타를 튕기며 노래 부른다. 남이 보면 그저 훌륭한 아들이다. 그들은 모른다. 한 집에 사는 어미의 어려움을. 내 마음에 쏙 드는 아들 대신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하도록 진정 마음을 내려놔야 하는 것인가. 철저히 평범한 어미로 아들을 비범하게 키우기 위해선 더 많은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인가.


얼마 전, 아들은 학교에서 한 적성검사 결과를 말해줬다. "엄마, 자존감이 10점 만점에 10점이 나왔어요. 그런데 공감능력은 4점이래요. 제일 낮더라고요. 내가 공감을 그렇게 잘 못하나?" 


아, 남편과 나는 서로 바라보며 탄식했다. 우리가 마냥 잘못된 건 아니었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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