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가르쳐준 나의 발견
예술이 지닌 특징 중 다른 하나는 취향에 의해 작품의 좋고 싫음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어떤 작품 앞에서 누군가는 극한의 미적 쾌락을 느낄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역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또한 예술의 순 기능과 관련된다. 즉, 예술은 사람들이 취향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생각해 보면 자기 취향을 정확히 알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Thomas와 Chess가 1950, 60년대에 진행한 뉴욕 종단 연구(New York Longitudinal Study) 기질 유형 분포에 따르면 순한 아이(Easy child)는 40%, 까다로운 아이(difficult Child)는 10%, 천천히 하는 아이(Slow to Warm up Child)는 15%, 혼합형이 35% 센트라고 한다.
여기서 까다로운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로 분류되는 아이들, 즉 10%의 아이들은 본인이 싫고 좋은 걸 아이 때부터 표현한다고 한다. 기질을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까다로운 기질이 좋은 기질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까다로운 만큼 자기가 좋고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취향을 잘 알지 못하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본인의 취향을 타고나면서부터 정확하게 아는 10퍼센트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은 사회 규칙에 맞춰 좋은 사회 구성원으로 커나간다.
그들은 부모가 준 것에 만족하고 거기에 안정감을 느끼며 사회에서 이행하라고 하는 본인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타고난 기질이 순하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고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을 이루는 데는 전혀 손색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 또한 나쁜 기질은 아니지만, 그 기질 탓에 이 아이들은 본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도 어느 순간이 되면 취향이라는 것이 생긴다. 다 잘 먹던 아이들도 김치찌개보다는 된장찌개를 선호할 수도 있고, 제육볶음보다는 불고기를 선호할 수도 있다. 취향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이 없다면 알 수 없다. 내가 어떤 가치를 더 높게 두는지, 어떤 행동이 더 중요한지 모든 것에 대해서 선택을 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게 바로 취향이다. 이러한 선택의 상황에 놓임으로써만 나는 나 자신을 알아간다. 하루에 세 번씩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노출이 됨으로써만 나의 취향을 알 수 있게 된다.
취향에는 나쁘고 좋음이 없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한다고 법이 처벌할 수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나의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취향은 주관적이지만 다들 보편적이라고 느낀다고 칸트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 취향은 자기만의 취향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동시에 자기 취향이 절대적이라고 ‘느끼’ 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자주 하시던 말들 ‘이렇게 먹어야, 이걸 먹어야 비로소 먹을 줄 아는 거’라는 말은 자기 취향이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말들이다. 하지만 취향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서양에서 ‘취향을 두고는 토론하지 않는다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이다.
취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예술이다. 단순히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취향을 작품 속에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다. 관객 역시 작품을 감상하면서 작품이 자신의 취향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그러면서 자기 취향을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 예술은 감성의 영역이기에, 말이라는 사고 체계 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세밀한 부분을 표현한다. 부성애, 모성애, 인류애, 연애 감정, 부모에 대한 사랑 모두 동일하게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예술은 각 사랑, 더 나아가 주관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 아티스트의 주관성을 표현하고, 관객은 아티스트의 표현을 거울로 삼아 자기 존재를 비추어본다. 예술 작품이 표현한 것을 말로 설명한다면 분명히 주제는 한정적일 테지만, 그럼에도 각 예술 작품은 독특한 형식을 통해 다른 느낌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관객 또한 자기를 비춰줄 다양한 거울을 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많은 사상가들이 예술에서 무엇을 다루는 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모든 걸 함축하는 한국 속담이 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속담은 (다소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예술 작품의 양립가능해 보이지 않는 특징, 즉 주관성과 보편성을 익살스레 나타낸다. 요컨대 예술의 표현 방식이 관객의 좋음, 싫음을 결정한다.
이렇듯 예술은 순응적 기질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을 까다로운 사람들로 만드는데 이바지한다. 물론 여기서 까다로운 사람이란 자신의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예술 작품 앞에서 계속 좋음, 싫음을 판단하거나 느끼면서 점차 자신의 취향을 잘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어떤 면에서는 점점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간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앞서 언급한 ‘틈’을 만들어낸다.
작품 앞에서 관객은 순간적으로 그럭저럭 흘러가던 삶에서 한 발자국 나와 예술 작품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 취향은 ‘이랬구나, 저랬구나’하면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기도 한다. 자기의 재발견이라는 표현이 역설적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기만큼 자기를 모르고 사는 게 대부분이 아닌가? 예술과의 만남은 자기를 다시 찾아내는 여정이며, 자기를 다시 빚어내는 시간이다. 그리고 취향은 자기 안의 여행에서 길을 안내하는 일종의 별자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