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의 미학

예술이 그려주는 나의 윤곽

by 발가락꽃




극강의 호감과 비호감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분야가 예술 중에서도 미술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미술이 걸어온 길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인상파의 등장 이후 아티스트들은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찾으려 다양한 실험을 했다.



예를 들어, 피카소는 야수파의 대가였던 마티스의 작품에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자신의 작품을 피카소에게 보여줬지만, 마티스는 피카소의 작품을 거절했으며, 같은 이유로 피카소는 자신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던 뒤샹의 작품을 내쳤다. 영감을 받았다고는 했지만 자유롭게 본인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거부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미술에서의 실험정신은 예술의 정의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들이 많이 등장하는 1960년대에 들어와 더욱 거세진다. 그래서 ‘미술의 틀을 부수는 작업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물질적 작품이 없는 갤러리 전시, 검정 캠퍼스가 전부인 그림, 대변을 만들어 내는 기계까지 모든 것이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에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많은 현대 미술의 작업들은 미술사적 맥락, 미술 이론 등 지식이 없으면 난해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많아 호불호가 극명히 나뉜다.



앞서 언급했듯, 예술은 온전히 내 안에서 계속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미술관에서 관객은 많은 작품들을 보며 직관적 선택을 한다. 그러면서 어떤 작품은 좋아하고, 어떤 작품은 싫어한다. 좋은 작품 앞에서는 오래 머무르며 많은 걸 느끼려 애쓰고, 싫은 작품은 바로 지나간다.



큐레이터가 작품을 선정하고, 공간에 작품들을 전시하는 일련의 행위를 큐레이팅이라고 하는데, 관객도 작품을 호불호로 나누면서 스스로 큐레이팅을 하는 셈이다. 모든 것에 호감을 느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불호가 있어야지 호감이 존재한다. 호감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밸런스 게임처럼 옆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기도 한다는 이야기이다.



예술공간에서 느끼는 호불호가 흥미로운 건 앞서 언급한 놀이 개념처럼, 작품 앞에서 새로운 놀이 즉, 내 취향을 찾아 떠나는 밸런스 게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밸런스 게임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면, 이윽고 우리의 뇌는 자기 선택의 이유, 그러니까 왜 이것이 싫고, 좋은지를 스스로에게 설명하려 한다. 이 과정을 천천히 관찰해 보자.



누구나 한 번씩 이유 없이 누군가가 좋거나 싫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작품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다들 처음에는 이유 없이 좋은 작품, 이유 없이 보기 싫은 작품을 만난다. 앞서 말했듯 예술은 감각을 도구로 하는 매체이다. 언어가 채워주지 못하는 걸 예술은 표현하고, 관객은 촘촘한 신경계의 자극을 동원해 미적 감각이라는 걸 하게 된다. 그래서 작품을 보자마자, 혹은 듣자마자 피부로 느낀다고 할 만큼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뇌는 처음으로 자극이 된다.



일단 미적 감각으로 자극된 뇌는 쾌, 불쾌의 감정 이후 반성하기 시작한다. 즉, 자기가 방금 느낀 걸 생각의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 자극을 계속한다. 방금 전의 이른바 미적 경험은 다시 한번 뇌를 통해 정리되며, 더 나아가 경험의 순간으로 정립된다. 그렇게 관객은 이 작업이 왜 좋은지, 왜 싫은지를 판단하게 된다.



사실 예술 작품이 왜 싫은지에 대한 설명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작품 중 한 부분만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리는 그 부분이 작품이 싫은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좋은’ 이유는 생각보다 찾기 힘들다.



단순히 하나의 요소만으로 무언가를 좋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여러 특질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특질들이 조화롭게 겹쳐졌을 때만 사람들은 좋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모든 조화를 망치는 강한 불호의 요소는 없어야 한다. 이렇기에 당연히 무엇인가 좋다는 판단의 근거를 찾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요컨대 불호의 감정은 부분적이고 단선적이지만, 호감은 복합적이고 층위가 깊다. 다시 말하면 어떤 작품이 좋은 감정으로 다가오려면, 작품의 표현이 드러나기 위한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야 한다. 작품이 전시된 곳, 작품 자체,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나의 상태, 기억, 가치관 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동원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운명의 순간에 사랑에 쉽게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예술을 감상한다는 건 결국 작품과 나 사이에 대화를 하며 교섭을 한다는 의미이다. 예술 작품 앞에서의 호불호가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과의 만남이 단순히 “좋다/싫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반응을 통해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지향하는지를 비추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품 앞에선 유난히 오래 머무르고, 싫은 작품 앞에선 금세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다. 그 선택의 패턴이 쌓여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메를로퐁티는 ‘살’이라는 개념으로 지각을 설명한다. 한 손이 다른 손을 만질 때, 나는 동시에 만지는 자이자 만져지는 자가 된다. 메를로퐁티는 이런 뒤바뀜의 가능성(reversibility)을 지각 더 나아가 시각에서 강조했지만, 사실 이는 청각에서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음악을 “듣는다”는 표현 안에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몸 전체가 리듬과 울림을 촉각/공간적으로 느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상호 얽힘이 가장 잘 체험되는 분야가 바로 예술에서이다. 그래서 회화 감상은 단순히 시각 정보 해석이 아니라, 색과 선의 관계 속에서 세계의 살을 체험하는 것이 된다. 즉, 관객은 본인의 모든 감각으로 예술을 체감하면서 감각의 총체가 되어, 감각하는 동시에 감각된다.



예술 공간에서 관객은 이런 방식으로, 마치 달팽이의 촉수처럼 공간을 탐험하며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골라낸다.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항상 이성, 논리 만을 앞세우는 사회에서 예술 작품은 우리를 본능으로 이끌며 자기 안의 내면을 들어다 보게 하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정확히 판단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강렬한 색과 과감한 구도를 좋아한다. 그 사람에게 있어 예술은 에너지와 해방감을 주는 매개일 것이다. 반대로 차분하고 단정한 구성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아마 안정감이나 일상의 균형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했듯 호불호의 경험과 반추는 나의 성향과 가치의 지도를 그려준다.



흥미로운 건, 호불호의 지도가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한때는 불호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 호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어떤 작품은 어린 시절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삶의 경험이 쌓인 뒤 다시 만났을 때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반대로 늘 좋아하던 것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끌리지 않을 때도 있다. 취향은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호불호는 나의 정체성을 고정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한다. 싫어하는 것을 통해 경계를 만들고, 좋아하는 것을 통해 중심을 세우며, 그 두 가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점점 더 입체적인 존재로 자라난다. 그래서 예술 공간은 단순히 작품을 소비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를 실험하고 갱신하는 거대한 실험실이 된다.



호불호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호를 인정할 때, 경계를 선명히 하고 온전한 자기를 지켜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호감을 인정할 때, 욕망과 이상을 확인하고 자가를 확장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만 취향은 진짜 힘을 갖고, 곧 나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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