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답을 묻고, 예술은 여백을 묻는다

정답 없는 세계가 주는 불안과 해방 사이에서

by 발가락꽃




예술은 난해하다. 그렇다, 예술은 언제나 난해하다. 유용함으로 점철되는 삶처럼, 예술이 딱 떨어질 수는 없다. 삶과 예술의 대치점을 앞서서 이미 유용함과 무용함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긴 했지만 예술은 삶과 같이 가면서도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삶은 정답을 요구한다. 시험지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 허락된다. 회사 보고서는 정확한 수치로 설명해야 하고, 법은 해석의 여지를 최소화한다. 계약서에는 모호함이 있으면 분쟁이 생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늘 ‘옳은 답’을 요구받았다. 선생님은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는 아이에게만 칭찬하고, 사회는 틀린 답을 내놓는 사람에게 벌점을 매긴다.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하지만 예술은 다르다. 작품은 굳이 하나의 정답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한 사람은 슬픔을, 다른 사람은 희망을 느낀다. 같은 연극을 보고도 누군가는 사랑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는 정치적 풍자를 읽어낸다. 답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수많은 답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예술은 굳이 명확한 답을 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정해진 답이 없는 이런 비정답성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준다. 이는 전략적 모호함이고, 이 모호함은 결핍이 아니라 풍요로 이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술은 언어 사이의 틈을 메꿔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을 세밀하게 전달하려면 전달하는 방식이 우리의 무의식처럼 모호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인 감각을 생각의 대상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한다.



즉, 모든 감각을 다시 생각해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뇌리에 박힌, 혹은 충격적인 몇 장면만 ‘생각’이라고 하는 이성의 장으로 가지고 온다. 그러면 이성으로 환원되지 못했음에도 우리가 봤던 것들은 어디로 갈까? 프로이트는 이걸 무의식이라고 이야기했고, 베르그송은 이걸 순수 기억이라고 했다.



어떤 단어로 표현을 하든, 확실한 건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보다 큰 범위이며 흐릿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기에 모든 것이 이성의 영역처럼 또렷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의식하고 있다. 예술은 이런 무의식의 영역과 닮아 있다. 언어로 굳이 환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한다.



삶에서 느낄 수도 있지만 실용적인 삶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한쪽 모퉁이에 치워뒀던 이야기들을 감각이란 매체를 빌어 ‘다시’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들이 확실하고 또렷하게 보인다면 굳이 예술의 형태로 만들 이유는 없어진다.



언어 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시는 문장의 공백과 여백으로 감정을 불러오고, 소설은 열린 결말로 독자의 상상을 자극한다. 이렇게 작가들은 언어의 여백을 통해 감정이란 틈이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예컨대 논리적인 정합성이 아니라 아련함이라는 감정을 집어넣고,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글을 읽고 나서도 무언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이 든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드러난다.



이런 감정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예술은 모호한 자세로 틈을 둔다. 관객이 가지고 있는 본인의 감정, 기억으로 빠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을 굳이 이성, 언어로 환원하여 공식에 대입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각자 가지고 있는 감정, 기억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은 순수 기억과 실용적인 기억 사이의 긴장에서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답을 찾으려 한다. 아까 설명했듯, 삶에서 반복되었던 훈련 때문이다. 시험에서 정답을 맞혀야 했고, 취업을 위해 이력서에 빈틈없는 답을 채워야 했다.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검색창에 입력하면 알고리즘은 늘 최적화된 ‘단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점점 ‘정답만 존재하는 세계’에 길들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은 예술 앞에서조차 본능처럼 정답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내가 놓친 의미는 없을까?’, 관객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러나 예술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작가는 관객이 자기 안의 감정 지도를 꺼내 들길 원한다. 그 지도는 각자만의 기억과 경험으로 그려진 지도다. 어떤 이는 그림에서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고, 어떤 이는 시의 한 구절에서 어린 시절의 방 냄새를 떠올린다. 정답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공간 안에서 관객은 작품 앞에서 서성인다. 눈은 작품을 훑지만, 마음은 어디에 멈춰야 할지 모른다. 이해의 언어로 다가가려는 순간, 작품의 감성은 멀어진다. 물론 미술의 역사나 철학 등을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다면 미술 언어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는 관객의 이런 사전 지식조차 전략의 축으로 삼아 새로운 모호함을 제시한다. 진정한 ‘미적 자세’란 작가의 모호함을 받아들이려 자기 존재 전체를 투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미적 지각이란 어쩌면 모호함을 긍정하는 감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음악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숨조차 크게 쉬기 어려운 고요함 속에서 첼로의 저음이 객석을 울릴 때, 그 떨림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으로 다가온다. 연극에서는 배우의 땀이 조명에 반짝이는 순간, 대사보다 그 이미지가 더 깊게 각인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정답을 찾으려는 태도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요컨대 예술의 난해함은 양면성을 지닌다. 딱 떨어지는 답을 주지 않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답답함을 주지만, 다른 의미로는 해방감을 준다. ‘난해하다’는 말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무수히 많은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뜻이다.


앞에서 설명했던 예술의 불투명함(opacity)이라는 특징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걸 표현하기에 다양한 의미가 나타날 수 있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다른 시기에 쓰인,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글들이 지금, 여기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 이런 난해함, 혹은 불투명함이라는 특성에 기인한다.



예술의 특수성은 바로 이 ‘비정답성’에 있다. 정답이 없다는 건, 오히려 내가 가진 감정과 기억이 자유롭게 스며든다는 뜻이다. 삶은 정답을 요구하지만, 예술은 정답 없음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삶은 답을 맞히는 기술을 가르치지만, 예술은 답을 내려놓을 용기를 가르친다.



정답 없음은 결핍이 아니라 풍요다. 예술은 모호하기 때문에 넓고, 난해하기 때문에 풍성하다. 그리고 나는 예술 앞에서 이해 못 할 자격이 있다. 그 자격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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