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문학과 예술이 주는 회복 탄력성

상처로 가득찬 당신을 위하여…

by 발가락꽃

회복 탄력성은 감정과 사고 두 축이 함께 움직일 때 완성된다. 예술이 감정을 열어주고, 인문학은 그 감정이 흘러갈 길을 만들어준다. 예술은 감정이 고여 있지 않게 함으로 유연성을 길러주고, 인문학적 사고는 그 감정을 해석할 수 있게 만든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할 때, 사람은 다시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얻는다.



AI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에 감탄하는 동시에, 묘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술은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정보는 넘쳐흐르며 모든 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AI가 많은 일을 해결해 주는 시대에 산다는 건 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불확실성과 불안이 인간을 잠식한다. 이런 시대에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회복 탄력성이다.



회복 탄력성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스트레스, 실패, 상처, 위기 같은 감정적 충격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무너진 마음을 스스로 다시 세우는 힘, 그리고 자신을 다독여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다. 회복 탄력성이 높다는 것은 자아가 튼튼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능력이 AI 시대에 더 중요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변화는 더 빨라졌고,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예전에는 한 직장에 들어가 평생 머무는 삶이 자연스러웠다. 일의 구조도 반복적이었고, 변수가 적었다. 그러나 AI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한다. 프로그램은 매번 바뀌고, 업무 흐름도 빨라지며,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동시에 오래된 기술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직업의 수명도 짧아지고, 산업 자체가 빠르게 재편된다. 이런 시대에는 누구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빠르게 따라가지만, 누군가는 한 발 늦는다. 그래서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나는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 커진다.



회복 탄력성이 필요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내가 느리더라도 다시 배울 수 있다는 믿음, 새로운 변화 속에서도 나를 부정하지 않는 마음, 익숙한 것이 무너져도 다시 적응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연성은 능력이 아니라 심리적 내구성에서 나온다. 회복 탄력성의 핵심은 결국 “나는 다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기 신뢰는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언젠가 들었던 따뜻했던 말 한마디, 실패했을 때 잡아본 누군가의 손,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줘 보았던 기억 등, 이런 작은 경험이 쌓여 자기만의 힘을 구성한다.



안내견은 정식 훈련 전에 1년간 위탁가정에서 지낸다. 위탁보호자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운 가족처럼 대하는 강아지를 대하는 것이다. 왜일까? 안내견은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 욕구를 통제해야 하고, 감정을 조절해야 하며, 위험 속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의 기반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회복탄력성도 동일하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 세상이 나를 완전히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누군가는 나에게 손을 내밀 것이라는 경험 혹은 믿음이 있을 때만 사람은 넘어졌음에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접촉이 적은 사회’가 되었다. 과거에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서로 다른 성격과 감정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회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 아이들은 사람보다 기계를 더 많이 접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일상이고, 학습도 디지털 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인은 관계를 피하고, 아이는 사람보다 화면과 더 친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회복 탄력성의 기반이 되는 ‘타인에 대한 신뢰’, ‘자기 자신에 대한 안정감’이 자연스럽게 쌓이기 어렵다. AI 시대 자체가 정서적 기반을 점점 약하게 만드는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자연스레 다음 질문이 생긴다. ‘이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회복 탄력성을 유지하거나 성장시킬 수 있을까?’ 예술과 인문학이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감각의 회복은 회복 탄력성의 출발점이다.



힘든 일이 닥치면 감각이 먼저 무뎌진다. 시야는 좁아지고, 감정은 굳어지고, 생각은 뭉개진다. 예술은 이 무디어진 감각을 다시 깨운다. 안개가 끼고 시야가 보이지 않는 멍한 상태의 일상에서 감정덩어리로 뭉쳐진 예술은 머릿속 안개를 치워내는 효과가 있다. 예술에 집중하는 순간 관객은 삶에서 잠시나마 멀어지고, 예술의 감정에 동화된다.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문학 등 모두 동일하다. 그렇게 한번 끊어졌던 감정은 회복된다. 마치 의사에게 수술을 받은 것처럼…



인문학은 자기 회복의 ‘서사’를 전개하면서 회복 탄력성을 키워준다. 사람은 실패를 이해할 때 단순히 사실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 실패를 이야기로 재구성하며 이해하려 한다. 문학은 인간의 상처와 연약함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철학은 인간이 왜 흔들리는지,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가는지 사유하게 만든다. 역사는 인간이 수없이 실패하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기록이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흔들렸고,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의 확인은 ‘혼자만의 실패’라는 고립감을 무너뜨린다. 바로 이 시점에서 회복 탄력성의 기반이 마련된다.



또한 예술과 인문학은 ‘비판 없는 공간’을 제공한다 회복 탄력성이 가장 크게 무너지는 순간은 자기가 자신을 너무나도 냉혹하게, 과도하게 심판할 때이다. 즉, 모든 문제의 원인이 모두 ‘나’에게 있다고 단정해버릴 때이다. 예술과 인문학은 이런 근거 없는 심판을 중지시킨다.



그림 앞에는 정답이 없다. 문학을 읽고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것은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음악을 듣고 슬퍼져도 되고, 아무 감정이 없어도 된다. 이런 비정답성은 인간을 다시 부드럽게 만든다. 기준과 판단에서 풀려난 순간, 마음은 회복을 시작한다. 자신에게 다시 공간을 허락할 때 인간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회복 탄력성은 감정과 사고 두 축이 함께 움직일 때 완성된다. 예술이 감정을 열어주고, 인문학은 그 감정이 흘러갈 길을 만들어준다. 예술은 감정이 고여 있지 않게 함으로 유연성을 길러주고, 인문학적 사고는 그 감정을 해석할 수 있게 만든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할 때, 사람은 다시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회복 탄력성은 “나는 다시 해낼 수 있다”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기 신뢰는 “세상 역시 나를 완전히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힘든 사람에겐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 동일한 감정을 가진 타인의 존재는 다시 한번 사람에 대한 신뢰, 내가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준다.



요컨대 AI 시대의 회복 탄력성은 결국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AI 시대가 선사하는 급격한 변화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우리가 유연하게 배우고 적응하며 다시 일어서는 힘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 속에서 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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