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함이 허용되는 공간 - 예술이 주는 쉼표

예술 안에서 평가받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을 보내다.

by 발가락꽃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구실’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엔 단지 밥을 잘 먹고, 깔깔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부모는 무조건적으로 아이를 사랑했고, 아이의 웃음소리 하나로 집안은 빛이 났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달라진다. 학교에 다니며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대학을 준비해야 하고, 그 후에는 취업을 해야 한다. 모든 사회에는 “몇 살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매뉴얼이 있다.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태어날 때 사랑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존재 - 밥 먹는 것, 똥 싸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던 우리의 존재는 사회로 나오면서 달라진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성과를 가지고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존재를 둘러싼 불편한 간극은 철학자들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가 이미 세계와 얽혀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관점은 달라도 결론은 같다. 인간은 애초에 ‘증명’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사회는 끊임없이 나를 평가하고,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예술 공간은 특별하다. 이곳에서는 무용함이 허용된다. 미술 전시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공기는 다른 곳의 공기와 조금 다르다.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달리 비어있는 새하얀 벽과 함께 정적이 흐른다. 전시 공간을 지칭하는 ‘화이트 큐브’라는 표현이 있듯, 공간은 비어짐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안에 놓인 작업들은 묘하게 공간을 가득 채운다. 내 발자국 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려 퍼졌다가 벽에 부딪혀 돌아온다. 그림 앞에서 멈추었을 때, 그 누구도 작품을 이해했냐고 묻지 않으며, 나도 굳이 머리를 굴리며 작품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한참을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아도 된다.



음악회 혹은 콘서트는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전체적으로는 전시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으면, 저음의 떨림은 나의 척추를 타고 전해지며, 음악 소리가 울릴 때 퍼져 나가는 공기의 떨림이 나의 몸을 감싼다. 눈을 감으면 선율은 곡선처럼 객석 위를 떠다니고, 옆 사람의 반응마저 음악의 일부가 된다. 작품들이 공간을 드러내며 전시공간을 묘하게 채우듯, 음악은 콘서트 공간을 음악의 색으로 가득 채운다.



연극 무대를 관람할 때는 또 어떠한가? 배우가 대사를 뱉으며 숨을 몰아쉴 때,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배우의 대사가 조명과 함께 터져 나올 때, 관객의 몸은 배우의 숨에 맞춰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가끔 난해한 대사가 나온다고 해도 연극에서는 그것 조차도 배우의 호흡으로 관객을 설득시킨다. 다시 말하면 나는 여기서 배우와 함께 호흡하고 땀을 흘리며, 배우들과 함께 극장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사회 안에 있지만, 사회와는 다른 이 공간 속에서 사회 안에서 주어진 내 역할은 잠시나마 완전히 잊힌다. 나는 색에, 음악에, 소리에 휩쓸리는 존재가 된다. 예술공간에서 유용성의 논리는 철저하게 배제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인종이든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관객은 있는 그대로 감각하며, 단순히 미적 판단만 할 뿐이다. 흡사 태어났을 때의 원초적인 모습처럼 관객은 존재하게 된다. 어떠한 ‘해야 할 일’이 잠시 중단된 이곳에서 우리는 무용함과 함께 있게 된다.



아티스트는 자신이 만드는 공간의 주인이면서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즉, 관객이 아티스트가 만들어 낸 걸 감상하지 않고 나가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다가 중간에 나간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객은 중요한 손님이고 그들은 초대받은 시간 동안은 ‘작품을 훼손하거나 공연을 방해하거나’하는 등의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자유롭다. 어떻게 보면 관객은 선택을 하는 것이고, 이 선택에는 아티스트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느슨함, 강제적이지 않음은 관객에게 안정감을 준다. 누구도 날 감시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데서 오는 편안함이다. 봄날의 오후 햇살 같은 예술의 나른함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무장해제 한다. 우리가 예술 공간에서 해야 할 일이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아티스트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해야 할 일’이란 무엇보다 우리의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처음 언어를 배우는 아이와 같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동안에는 언어를 드문드문 아는 상태인 것처럼,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예술의 감성 언어를 그럭저럭 알고 있다. 언어를 배우는 아기들은 대부분 미숙해서 말이 통하지 않지만, 2살짜리 아기가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관객이 작품 앞에서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고 해서 혼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술 작품을 통해 관객은 몰라도 존중받고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 초대된다.



다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걸 찾는 것이며, 이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아기가 가진 사명과 같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교감할 누군가를 찾고, 싫고 좋음을 가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애착이 형성되는 건 엄마와의 관계에서이다. 예술에서의 무용함도 어찌 보면 원초적인 끌림과 결을 같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용함이 허용될 뿐 아니라, 권장되는 예술 공간은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라고 속삭여준다.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을 때 받았던 무조건적 사랑을 다시 한번 체험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도 여전히 작은 불씨처럼 남아,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하고, 너그러워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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