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배경이 만든 서로 다른 객관성

내 생각이 ‘당연한 기준’이 되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과정

by 발가락꽃




객관성이란 무엇일까?


객관의 반대는 주관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말할 때 "지금 내가 객관적인가?", "너무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한다. 하지만 객관성은 고정된 값이 아니다.



객관성은 결국 '많은 개인들의 주관'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평균일 뿐이다. 즉, 집단적 합의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또 다른 누군가를 둔다. 보통 이를 '초자아'라 부르거나, '이성'이라고 지칭하며 최대한 남들의 기준, 그리고 남들의 시선으로 내 상황이나 내 판단을 보려고 한다. 이것들은 나에게만 치중되어 있는 내적 감정에서 한 걸음 물러나기 위한 장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장치만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다. 결국 남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객관성, 사회의 합의체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객관성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객관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계속 바뀐다.



지금 옳다고 여겨지는 판단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모두가 맞다고 했던 것이 틀리기도 한다. 그게 바로 객관성의 아이러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움도 별다르지 않다.



2016년 말부터 미용 통역을 했다. 처음 강남의 대표님이 프랑스에 오셨을 때 나에게 아주 진지하게 물었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프랑스에 거지가 왜 이렇게 많아요?"



처음엔 그냥 구걸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겠지 했는데, 대표님이 지목한 "거지"를 보니 세상 그렇게 평범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낡은 느낌의 옷, 헝클어진 것 같은 머리. 그냥 옷이 좀 힙했을 뿐이었다. 사실 프랑스에 오래 산 내 눈에는 그들은 누가 봐도 패션에 관심 많고 꾸며 입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대표님께 "저런 사람은 거지가 아니라, 그냥 힙한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설명해야 했다.



같은 사람을 보고도 나와 대표님이 본 것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각자 가진 '객관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님에게는 한국의 미적 기준이 객관이었고, 나에게는 프랑스의 미적 기준을 알고, 그들의 객관성을 확보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2019년부터 한국에도 골든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오시는 대표님들마다 아이들에게 사주신다며 그 비싼 골든구스를 구매하시기 시작하셨다. 2020년 초에 다시 교육을 오신 미용 대표님도 골든구스를 구매하셨다.

*골든구스는 신발 브랜드로, 이미 오래 신은 듯한 '사용감'을 디자인한 브랜드. 말 그대로 꼬질꼬질의 정석.



그때 "거지 같다"던 스타일이 이제는 한국에서도 힙하고 세련된 것이 되어 있었다. 객관성이 바뀐 것이다. 한국의 집단적 합의가 변화한 순간이었다. 결국 객관성이란 속한 집단의 합의일 뿐, 절대적 기준이 아닌 것이다.



미의 기준도 유행도 돌고 돈다. 다들 가지고 있으면 다들 가지고 있는 대로 매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모두가 가진 것을 피해 또 다른 이는 새로운 걸 만들어내고,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것을 우린 다시 아름답다고 느낀다. 객관성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움조차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행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속에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것이 마치 객관적 아름다움인 것처럼 항상 갈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속해있는 집단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객관성을 넓힌다는 것은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더 많은 주관을 수집하는 일이다.

내가 본 것이 하나밖에 없다면 나의 객관성, 그리고 그 객관성을 담보로 한 선택의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게 많다면, 내 지평이 넓어진다면, 내 안의 타자성은 커지고 나의 선택의 폭은 증가한다.



이것이 견문을 넓히라는 말의 진짜 의미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양한 집단의 합의들을 쌓아 올리는 것.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전통은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자 유럽 각지의 화가들이 이탈리아로 몰려갔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다른 세계의 객관성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각자의 문화적 바탕 속에서 자라난다. 그 바탕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긴 어렵다. 하지만 창조성과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그 '바탕과의 차이'에서 생긴다. 다른 문화를 보고, 낯선 다양성을 경험하고, 그걸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시키는 과정. 이것은 내 안에 다른 객관성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이런 다양한 시선은 예술가, 그리고 창작자들에게 더욱더 중요하다. 내 세계와 다른 세계의 충돌로 인한 틈은 생각을 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독특한 생각이 바로 '나만의 것'이라고 하는 오리지널리티를 생성하는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생산해 내는 힘은 결국 ‘다른 안경’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안경은 더 넓은 세계, 더 다양한 목소리에 노출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객관성을 넓힌다는 건 단순히 중립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세계의 주관을 자신의 내면에 쌓아 올리는 일이다. 그렇게 축적된 다양한 시선이 결국 나만의 관점, 나만의 언어, 나만의 세계를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