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1-12
어떤 책은 내용보다 책을 읽을 당시 온도와 습도, 냄새로 기억된다.
사키의 단편집 <토버모리>의 마지막 책장을 덮자 몇 권의 책이 떠올랐다. 당시의 온도, 습도와 함께.
뉴욕에서 한 달 살기를 준비하며 몇 권의 책을 챙겼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시기에 떠난 여행이었기에 여름옷과 가을 옷을 모두 챙겨야 했다. 이미 짐으로 가득한 캐리어에 책과 노트북을 기어이 챙겨 넣었다. 3권의 책을 넣었는데 그중 한 권이 <눈 뜬 자들의 도시>였다. 이상하게도 나머지 2권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눈 뜬 자들의 도시>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던 순간은 기억난다. 맨하튼에서 퀸즈 플러싱으로 향하는 전철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속편인 <눈 뜬 자들의 도시>는 전편만큼 충격적이거나 전율을 불러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당시, 덜컹덜컹 거리는 전철소리와 해가 지며 전철을 가득 채운 주황빛, 눅눅하던 전철의 냄새, 옆자리에서 나에게 중국어와 일본어로 말을 걸려고 중얼거리던 10대 소녀의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도망치듯 갑작스레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뉴욕의 호텔과 한인민박은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었다. 며칠씩 쪼개 자리가 난 곳마다 예약해서 겨우 한 달을 채웠다. 맨하튼에서 먼 플러싱 한인민박까지 예약해야 했다. 2일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눈 뜬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전철로 2시간 넘게 왕복해야 했기에 책을 읽거나 다이어리를 쓰며 그 시간을 채웠다. 뉴욕에서 한 달 동안 살겠다고 떠나왔지만 3주 정도쯤 넘어가자 들뜨기보다 외롭고 불안했다. 책을 숨기듯 챙겨 오지 않았다면 더 외로웠을 것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발견했던 순간도 기억난다. 신문 한 면에 가득했던 요네하라 마리 책 광고를 보자마자 도서관에 갔다. 광고를 보던 순간의 건조하던 공기, 도서관 책장에서 풍겨오던 오래된 책 냄새가 아직도 떠오른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 읽던 <프라하의 소녀시대>. 그때의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생생하다.
일본공산당 간부인 아버지 때문에, 프라하에서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았던 10대 일본 소녀의 이야기. 동양에서 온 소녀의 시선으로 본 1960년대 초반의 프라하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세계(異世界)에 빨려 들어가듯 단숨에 읽었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았던 그녀의 시선과 통찰력, 유머감각에 한껏 빠져 한동안 요네하라 마리 책만 읽으며 지내기도 했다. 뒤늦게 접한 부고 소식 이후, 그녀의 책을 다시 펼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책을 생각할 때면 항상 그 공기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