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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름차차 Dec 06. 2021

[출판 프로젝트일지 #5] <취존공주> 작업일지 (1)

-왕자가 나오지 않는 공주 이야기를 만드는 여정

왕자가 나오지 않는 공주 이야기


내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는 대부분
'옛날 옛적 공주가 살고 있었어요'로 시작해
'공주는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이 났다.


의붓어머니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백설공주, 무상의 가사노동에 시달리며 탈출을 꿈꾸는 신데렐라, 공주는 아니지만 마녀에게 갇혀 머리를 기르며 살다 긴 머리를 늘어뜨려 자신을 구해줄 남성을 찾는 라푼젤이 그 시절 우리가 읽던 동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었다.


여성의 적은 의붓어머니, 마녀 등 여성이었고 남성 가족은 주인공에게 관심이 없거나 무기력한 흐릿한 존재였다. 그녀들은 결국 외부의 남성-특히 왕자-를 통해 구원받았다. 갇혀있던 공간에서 탈출하고 왕자의 키스에 마녀의 주문이 풀려 잠에서 깨어나고 잿더미에서 벗어나 왕궁으로 입성(?)했다. 남자 주인공을 기다리다 도움받아 탈출하고 왕자의 배우자가 되는 것에 성공(?)한 그들은 복수도 남자 주인공의 힘을 빌려 진행했다.


나는 동화 속 그들을 보며 언제나 질문을 던졌다. 왕자는 왜 항상 백마를 타고 오나요?부터 시작한 내 질문은 왜 공주들은 매번 마법에 걸려요? 마녀는 왜 공주를 미워해요?로 넘어가 공주는 왜 공부를 안 하고 왜 본인이 왕이 될 생각을 안 하냐는 질문으로 끝났다. 병원놀이를 할 때면 남자 애들에게만 의사 역할을 주는 유치원 선생님에게 이미 수차례 질문을 던지던 나였기에 유치원 선생님들은 나를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 부모는 이상한 질문을 하는 나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겼다.


더 이상 동화를 읽지 않는 나이가 되자 나는 그 동화를 잊고 다른 곳에 질문을 던졌다. 여성정치 수업시간에 동화 다시 쓰기 과제를 받고 잊었던 그 동화들을 다시 읽었다. 어릴 때에도 이상했던 동화는 스물을 넘기고 다시 읽으니 더 불쾌하고 불편했다. 동화를 다시 읽을 때에도 다시 쓸 때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 동화를 다시 쓰고 싶었다. 마녀는 저주를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공주의 조력자가 되었고 재혼으로 고통받는 의붓어머니의 아픔도 함께 그렸다. 무책임한 아버지들에 대한 비판의 시선도 담아냈고 수동적인 공주 캐릭터들을 바꿨다. 이럴 거면 다시 쓰는 게 아니라 새로 쓰고 싶었다. 언젠가 반드시 왕자가 나오지 않는 공주 이야기를 쓰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과제를 제출하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또다시 잊었다. 동화가 주는 불편함은 이런 걸 보고도 아무것도 안 했던 나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지만 결국 나는 다시 잊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동화를 읽고 자란 수많은 여성들은 잊지 않았다. 동화 바탕에 깔린 반여성주의를 비판하였고 우리의 다다음 세대는 새로운 버전의 동화를 읽으며 자랄 수 있게 만들었다. 요즘 어린이들은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 자매를 통해 공주가 여왕이 되는 이야기를 보고 자란다. 공주는 모험을 떠나고 한눈에 반해 결혼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임을 대사를 통해 직접 배우고 있다.




다시 만난 그림책, 어른을 위한 동화

청년을 주제로 우리가 그리는 우리 이야기를 기획하며 여섯 개의 소주제를 선정했다. 노동, 주거, 인간관계-연애, 뒤늦은 사춘기, 심리적 어려움 그리고 소수자. 마지막 여섯 번째 퍼즐을 맞추며 생각했다. 소수자를 다룰 때 반드시 여성의 이야기도 함께 다루겠다고.


당시 총괄기획자로 글작가, 그림작가를 모집하며 내가 글작가로 참여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총괄기획자와 팀 기획자를 맡아서 진행하기에도 3 달이라는 시간은 무척 짧았기 때문에 글작가가 혹시라도 사라지면 내가 그 자리를 채워야겠다는 마음가짐 정도였다.


그러나 그림작가의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다 이은지 작가의 그림 앞에서 마음이 바뀌었다.

이은지 작가 그림 ⓒ이은지 (인스타그램 @yulbamm)

*이은지 작가 인스타그램


서양풍과 동양풍의 그림을 모두 그릴 수 있으며 인물 묘사뿐 아니라 배경 묘사도 섬세하게 하는 이은지 작가의 스타일에 매료되었다. 이은지 작가의 그림을 보며 이 작가라면 왕자가 나오지 않는 공주 이야기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양의 공주가 아니라 서양과 동양 사이 어디쯤엔가, 어느 시기엔가 살았을 법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은지 작가 그림을 보며 그 자리에서 바로 공주가 모험을 떠나고 돌아와 좋은 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공주. 그 공주가 길 위에서 다름으로 인해 상처 받고 차별받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은지 작가의 그림을 본 순간
마치 어릴 적 그리고 대학교 때 과제를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나의 다짐이 응답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소녀들을 위한 동화를 새로 쓸 거야




플롯, 13 스프레드 26페이지에 펼쳐진 공주의 여정


'취존공주'는 소수자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이은지 작가의 그림을 보자마자 떠오른 제목이다. 계속 가안인 상태로 작업 했는데 결국 최종 제목이 되었다. 말 줄임 표현이 가볍지 않을까 싶었지만 '취향 존중 공주'라고 풀어쓴 것보다 직관적이고 그림책 제목 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제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줄거리를 로그 라인으로 정리했다. 기획자-글작가-그림작가 3인의 팀 구성을 위해 첫 번째 기획회의 이후 6개의 아이템과 아이템별 글작가를 확정하였다. 글작가로 선정된 지원자가 구상해온 아이템도 있었고 총괄기획팀이 주제와 소재를 배분해 확정한 아이템도 있었다.


내가 구상한 <취존공주>는 이은지 작가의 그림을 보고 펼쳐낸 세계였기 때문에 이은지 작가와 같이 작업하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그림작가의 선호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여섯 개의 아이템을 로그 라인과 그림 스타일, 래퍼런스로 삼을 그림책 등을 정리해 그림작가에게 이메일을 발송하였다.


내가 정리한 취존공주 초기 로그 라인과 작품의 방향은 아래와 같다. <세상 끝까지 펼쳐진 치마>를 래퍼런스 삼아 컬러 그림책의 다양한 색감을 보여주며 동시에 동양풍 화풍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래 이미지는 실제 그림작가들에게 발송한 이메일 캡처본이다.

2020년 8월 26일, 그림작가에게 발송한 아이템 소개 메일 ⓒ 오월의 얼굴 & 상상공작소



글작가는 플롯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글작가가 시놉시스를 완성시키고 글콘티 작업을 마치면 스프레드 별 그림 콘티 논의가 시작된다. 그림작가는 글작가의 플롯과 캐릭터 구성을 바탕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고 회의를 통해 확정한다. 플롯의 단계는 온전히 글작가가 담당해야 하는 시간이다.


공주의 여정이라는 이야기의 플롯을 두고 여러 가지 버전을 생각해봤다. 한 명의 공주가 아니라 공주들의 조력, 연대도 다루고 싶다 보니 길 위에서의 이야가 중요했다. 여정은 목적지인 책의 도시를 방문했다 돌아오는 귀환의 과정을 다루었다. 경유지와 길을, 여행과 귀환을 구분해서 구성했다.


<취존공주> 플롯 1안 ⓒ오월의 얼굴


<취존공주> 플롯 2안 ⓒ오월의 얼굴


'책의 도시'라는 여행 목적지에 도달한 뒤 집으로 오는 귀환 과정에 다른 세계를 또 하나의 경유지로 표현하기보다 '돌아감' 그 자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책의 도시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결국 왕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나라와 세계에 들리는 모습은 이러한 공주의 결심을 살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3 스프레드 26페이지를 다음과 같이 구상했다.

왕궁 (2 스프레드)- 길 a (1 스프레드) - 다른 세계 A(2 스프레드) - 길 b (1 스프레드) - 다른 세계 B(2 스프레드) - 길 c(1 스프레드) - 여행 목적지(2 스프레드) - 길 d=귀환과정(1 스프레드) - 왕궁(1 스프레드)= 총 13 스프레드, 26p


 

길에서 벌어진 일들을 2-3가지 버전으로 준비하다 보니 세계관이 더 커졌고 결국 언젠가 완성할 3편의 공주시리즈가 구상되었다. 결국 <취존공주>는 세편의 공주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 되었다.


취존공주의 세계가 한없이 펼쳐지고  회의마다 내가 여러 버전을 들고 오자 양명운 기획자는 <취존공주>는 13 스프레드의 세계로 줄여야 한다고 중심을 잡았다.


플롯과 페이지 구성을 마치니 시놉시스가 금세 완성되었다. 글 콘티와 그림 콘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작가는 이야기를 상상하며
세계를 펼치고 펼쳐낸다
그림작가는 글작가가 구상하고 펼쳐놓은
세상을 그림으로 구현해낸다
기획자는 작품을 가까이 봤다 멀리 봤다 하며 펼쳐진 세상을 주섬주섬 접어낸다.







-다음 편 예고,

<취존공주>출판일지(2) - 글이 그림이 되는 시간, 화려하고 기괴한 이세계(異世界) 위한 그림 콘티




 *<취존공주> 출판 프로젝트 일지


 2020.06.16 청년인문상상 공모전 지원

 2020.08.01 포스터 파일 1차 시안

 2020.08.02 포스터 제작 완료

 2020.08.03 구청에 <오월의 얼굴> 출판사  신고 & 공모전 사이트에 모집 공고 게시

 2020.08.14 그림책공작소 지원 마감

 2020.08.17 최종 선발 공지

 2020.08.25 첫 번째 총괄기획회의  (장소: 경의선 책거리 쇼룸)

 2020.08.26 그림작가에게 취존공주 아이템과 로그라인 발송

 2020.08.27 <취존공주>팀 결성

 2020.09.03 <취존공주> 첫 번째 회의- zoom 회의로 진행 / 시놉시스 리뷰

 2020.09.06 <취존공주> 이은지 작가의 취존공주 캐릭터 가안

 2020.09.08 <취존공주> 두 번째 회의 - 그룹콜 (전화회의)




컬러 옴니버스 그림책  <오월吾月: 나의 달>에 <취존공주>가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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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나의 얼굴>  흑백 옴니버스 그림책, 첫 번째 이야기
동굴 속 얼굴,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5878499?OzSrank=1


이제 6대 온라인 서점 모두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교보, 영풍, 예스24, 알라딘, 반디앤루니스,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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