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31
마음에 오래 남는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에 오래 남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내뱉는 순간, ‘마음에 오래 남는’ 동안 느꼈던 마음의 깊은 여정은 뿔뿔이 사라져버리고 ‘영화’만 남아 버린다. 지난밤 본 영화에 대한 감정이 차고 넘쳐 남편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말을 꺼내면 안타깝게도 등장인물과 이야기만 남아 버린다.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고 좋아하게 되는 지점도 그렇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배경보다 나만 포착할 수 있는 작은 포인트 때문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내가 말을 할 때 귀 기울여주는 살뜰한 표정이나 내가 한 말들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음에 만날 때 그 일의 안부를 다시 물어주는 것. 혹은 턱 한 쪽에 손을 괴는 습관이나 살짝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 같은 것. 한 박자 뜸을 들이고 말을 시작하는 사소함.
누군가에게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지만 그들은 내가 사랑한 지점을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 혼자 그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 나만 볼 수 있는 거울 하나를 가지고 그 거울 속에 계절 하나를 통째로 심는다. 봄에는 바람에 꽃잎들이 흩날려 거울 속 강물을 물들이고 여름에는 출렁거리는 이파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조금 적요로운 가을 새벽에는 내가 사랑한 감정을 데리고 걷는다. 꽃과 풀과 물과 하늘은 모두 내가 새로이 이름 붙인 사물처럼 새롭다. 겨울의 거울에는 나와 그 사람의 손바닥으로만 지울 수 있는 성에가 생긴다.
시간이 흐르면 영화를 보자마자 가슴에 맴돌던 감정들이 조금씩 사그라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남은 여운의 그림자도 시간과 함께 좁아지고 낮아진다. 100%를 넘어선 감정은 80%, 60%를 지나 30% 정도 밖에 남지 않게 되고 끝내 0%가 된다. 0%가 되면 비로소 그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지면서 새로운 차원의 감정이 생긴다. 아주 깊은 바다에 사는 생물들을 우리는 보기 힘들 듯 그 감정은 주인조차 보기 드문 것이 되지만 분명 존재해서 주인 곁을 잠자코 지킨다. 일상을 겪는 동안 문득 그 영화가 떠오르고 문득 그 사람이 떠오른다. 해저에 숨어든 그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사랑이 있어 영화가 만들어지고 멜로디가 생겨난다. 색은 그림 위에서 민낯을 드러내고 작가의 손은 글을 쓰려고 자판 위를 산책한다. 예술가는 그것들을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만든 것들을 ‘내 것’처럼 느끼고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관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