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어야 닿는 당신의 집

당신 다음엔 무엇 41

by 강윤미
오래 걸어야 닿는 당신의 집.jpg 그림 metaphor




걸으면 바닥에 끌리고 먼지가 묻을 것만 같은 발목까지 오는 긴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촛불에 의지해서 수를 놓고 글을 쓰는 그녀들. 남자의 이름으로 책을 낸 여자들. 부잣집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값비싼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그녀들. 사교장에 가서 남자와 춤을 추고 눈을 맞추고 여자들끼리의 질투와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고독해지는 그녀들.

긴 치마 속에 코르셋을 감추고 깃털 모양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먼저 배우는 그녀들. 거추장스러운 장식과 몸을 압박하는 것들 때문에 그녀들의 삶은 숨이 막혔겠지만, 난 이상하게도 긴 드레스 자락과 한쪽으로 기울게 쓴 모자를 쓰고 한 손으로 양산을 든 그녀들을 보면 철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모네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여인. 마차를 타고 드넓은 평원을 달려가는 그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속을 걷고 걷는 그녀.


사랑에 빠질까 말까 고민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해서 타락해지고, 어두운 귓속으로 비밀과 뒷담화를 밀어 넣는 여인들. 폭풍우 속을 뚫고 뛰어오는 말이 어느 밤, 편지를 전달한다. 편지를 읽은 그녀들은 나락에 빠지고 불행을 얻는다. 사랑을 깨닫고 가족의 포옹을 소중하게 떠올린다.


마음속에서 뭔가 빠져나갔는데 빠져나간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때, 나는 여인들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 말보다 글 속에 진심을 담고, 표정보다 눈길로 말을 건네는 일. 긴 오해와 망설임을 돌고 돌아 비로소 인연을 맞이하는 일.

무릎을 꿇고 청혼을 한다. 당신이 소중하다는 말 대신 무릎을 굻는다. 편지를 쓴다. 당신의 눈동자에 내 눈동자를 수놓고 싶은 마음 대신 종이에 글자를 입힌다. 산책을 한다. 당신 곁에 있고 싶다는 말 대신 같이 걷자고 한다. 이마에 머리를 맞댄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상대방의 이마에 내 온기를 전한다.


직설적인 표현은 때론 버겁다. 매서운 조언과 일방적인 포옹은 내 마음이 여유롭지 못할 땐 빗겨나간 못처럼 다른 방향으로 뚫려 버린다. 그래서 나는 조금 오래 걸리는 편을 선택한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걷는다. 걸으면서 마음을 반추한다. 마음이 잘 소화될 수 있도록, 마음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석양의 그늘이 드레스 자락을 비춘다. 그녀들은 이제 선택을 한다. 그녀들의 인생은 침묵을 지키는 낮고 어두운 촛불의 불빛이 아니라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는 고독함을 아우르는 여유에 달려있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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