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44
육교와 강, 그리고 기차.
그것들은 내가 섬을 떠나와서 목격했던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모두 어디론가로 가고 있거나 이동하게 해준다는 특징이 있다.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변화하는 일. 그것들에 몸에 맡기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장소로 바뀌게 되는 일.
섬은 늘 정지되어 있고, 정박해 있으며 떠날 필요 없으므로 바닷물에 묶여 있다. 그런 것들은 그곳에선 불필요하다.
섬을 떠나온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방랑이며 용기였다. 그때 몸에 남은 기운을 다 써버렸는지 이제 나는 어디로도 쉽게 떠날 마음을 내지 못하며 살고 있다. 떠난다는 것은 다른 빛깔의 하늘과 다른 종류의 바람을 맞으며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경한 것들을 피부에 받아들이며 적응해내는 일을 다시 버텨낼 자신이 없다. 떠나온 곳을 갖고 있는 사람은 떠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자신에게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하고 알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을 늘 궁금한 채로 손에 쥐고 살아간다.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한다. 창 가까이에 앉아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보는 것을 아낀다. 터널을 지나가면 터널 속에 묻힌 풍경은 까맣게 타버린다. 다시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 환해지면서 들과 강이 등장한다. 육교와 건물이 보인다. 드문드문 집이 보이고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정지해있다. 빨리 지나가 버리는 기차 속에서 그들의 속내를 알 길이 없다. 그들은 뭘 하던 중이었으며, 어디로 가던 길이었을까. 오늘 어떤 생각과 감정에 귀 기울였을까. 기차 속에서 상념에 빠지는 일은 즐겁다. 평소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깊이 침잠해 들여다보고, 평소 생각했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여유를 얻는다. 아주 가끔 시까지 확장될만한 이야기들이 쏟아지기도 한다.
기차를 타고 보는 것들은 내가 섬 밖에 나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느끼게 한다. 기차라는 것이 섬에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섬에서는 ‘탈 것’을 이렇게 오래 탈 일이 없다. 터미널에서 서귀포 가는 버스를 타서 바다로 갔던 스무 살. 할아버지의 기일에 동생들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갔던 애월. 소풍날 아침,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갔던 함덕.
타는 것에 몸을 맡기고 풍경을 오래 지켜보기엔 섬은 짧다. 섬은 짧은데 내가 품은 생각들은 길어서 섬을 떠나와야 했을까. 모자 같은 섬에 내 생각을 감추고 나는 섬 밖에 나와서 모자 같은 섬을 본다. 섬에 있을 때 섬인 줄 몰랐던 무지와 섬 밖으로 나왔을 때 섬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던 피로에서 온 무기력. 나는 그것들을 수첩에 적는다.
수첩에 시는 넘쳐나고 섬에 가둔 물은 가끔 내 수첩을 적신다. 글자가 번진 자국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