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53
겨울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코트 때문이다. 나는 코트를 좋아한다.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패딩점퍼보다는 코트를 입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 패딩점퍼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코트를 입는다. 옷의 여러 형태 중에 특별히 나는 코트를 아낀다. 코트를 입으면 내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이 기분이 좋다. 코트는 입은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는 매력을 가졌다.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갈 때, 이따금 나는 집에서 입었던 티셔츠 위에 바지만 갈아입고 코트를 입는다. 코트의 단추를 잠그고 머플러를 두 바퀴쯤 돌린다. 감쪽같다. 안에 입은 후줄근하고 색이 바랜 티셔츠는 사라지고 없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그렇다. 집에서 입었던 티셔츠와 제멋대로 주머니가 불룩 생겨버린 바지를 입고 갈 때도 무릎까지 오는 롱코트를 입고 가면 그럭저럭 괜찮다. 코트는 내가 좀 더 편하도록, 내가 부러 괜찮은 척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친구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짐짓 짐작도 못 할 나의 일들을 감싸주는 큰 보자기.
코트를 입고 싶어 겨울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트를 입을 수 있으니까 겨울이 좋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에는 내 생일이 있다. 나는 남편에게 코트 선물을 받는다. 다른 옷에 비해 비싼 코트를 선물로 받을 수 있어 좋다. 비교적 쉽게 살 수 있는 티셔츠나 바지 같은 것이 아닌 코트를 선물로 말할 수 있어 좋다. 그렇다고 비싼 브랜드 옷을 살 엄두를 내보진 못한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에 부담이 생기면 그 옷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 올 때마다 적당한 가격의 코트를 사서 기분 내는 것이 겨울을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그림책 『안나의 빨간 외투』에는 코트가 완성되기까지의 긴 여정이 그려져 있다. 파란 코트가 작아진 안나에게 엄마는 새 코트를 마련해주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먹을거리조차 구하기 어렵던 때였고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안나의 엄마는 양을 기르는 농장에 가서 금시계를 주고 양털을 얻는다. 양털을 얻은 자루를 들고 이번에는 물레질하는 할머니에게 간다. 집에 있던 램프를 할머니에게 드리고 양털을 실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실이 완성되자, 숲속에서 딴 산딸기로 빨갛게 물들인다. 안나가 빨간색을 원했기 때문이다. 옷감 짜는 아주머니는 석류석 목걸이를 받고 옷감을 짜준다. 재봉사 아저씨는 도자기 찻잔을 받고 빨간 옷감으로 코트를 만든다. 안나만을 위한 빨간 외투는 주인공이 되어 쇼윈도에 걸린다. 코트는 안나의 몸을 감싸는 것을 잊지 않았고, 비로소 안나의 코트가 되었다.
딸의 코트를 장만하기 위해 생각해낸 엄마의 비책. 이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라는 사실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어릴 때 나도 코트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입었던 점퍼 하나가 있었다. 동료들과 육지로 부부동반 여행을 다녀왔던 부모님이 남대문 시장에서 사다 준 점퍼. 가 본 적 없는 서울에서 온 낯선 점퍼. 그 옷을 나는 마음에 들었으려나 아니면 조금 낯설어서 맹숭맹숭 다가가지 못 했으려나. 옷을 받아든 나의 마음이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아이들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은 확실하다. 누군가 음식을 해줘야 하고 옷을 사다 줘야 하고 연고를 발라줘야 하며 안아줘야 한다는 것. 다른 것들은 나도 부족함 없이 받아본 것 같은데,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안아주는 일.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당장 필요해 보이진 않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른이 되어 보면 아는 것이다. 또한 돈이 아닌, 몸을 써야 한다. 두 팔을 벌려야 하고 입술을 움직여야 한다.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자랐던 시절의 부모님들은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물론 다정하게 표현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부모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일은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랑의 행위를 ‘셔츠’에 비유해서 『엄마의 셔츠』라는 그림책을 냈다.
내 몸에 착 감기면서, 단추를 잠갔을 때 나를 지탱해주는 코트의 힘을 나는 좋아한다. 코트 덕분에 겨울이 춥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코트 덕분에 겨울이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코트 덕분에 나도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