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벽돌 Feb 15. 2022

[한쪽 소설] 울보들아 들어라 -3

마키아벨리가 고(告)함

나는 1469년 5월 3일, 나의 아버지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의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피렌체 도심 한가운데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베키오 다리에서 몇 발짝 떨어진 비아 로마나(Via Romana)의 허름한 집이었다. 나의 가문은 토스카나 지방의 귀족이었고 아버지는 법률가였으나 집안은 찢어지게 궁색하였다. 명색이 법률가였던 아버지가 왜 세금도 내지 못하는 '스페키오(specchio, 세금 미납자의 명단에 오른 사람)'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어떤 공직에도 오를 수 없는 불명예를 겪어야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 자라났고, 그것이 숙명인 줄로만 알았다. 


이탈리아 피렌체 베로키오 다리의 파로나마 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는 어린 시절부터 풍요로움이 아니라 궁핍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으며 그렇게 굶주림과 모자람에 익숙해졌다. 스페키오의 아들로서 법률가를 꿈꿀 수는 없었다. 아니 자격이 있었다 해도 여유가 없었으리라. 피렌체 남쪽 산골 마을인 산 카시아노(San Cassciano), 산탄드레아(Sant'Andrea)에 있는 작은 농장이 재산의 전부였던 우리에게 번듯한 교육과 사치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 때부터 나의 체구는 왜소했고 볼은 핼쑥했다. 나는 배고픔만큼 나의 욕망을 줄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목마름이 있었다. 그것은 활자에 관한 것이었다. 


1455년 스트라스부르크 사람 쿠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금속 활자 인쇄술은 1471년 우리 도시 피렌체로 전래되었다. 아버지는 말끔하게 인쇄된 책 한 질(帙)을 욕심냈다. 로마 사람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史)'였다. 하지만 많은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우리 집에는 책값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남는 시간과 열정으로 돈을 대신했다. 시내의 바람둥이 한량이 어여쁜 처녀를 탐하듯 그는 책을 탐했다. 그 '로마사'를 얻기 위해 아홉 달에 걸쳐 방대한 역사서의 색인 작업을 대신해 주었다. 인내와 정성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밤마다 어두운 촛불 아래에서 책 속에 뿌려진 단어 하나하나를 분류하고 맞춰 나갔다. 인쇄업자는 아버지가 한 권의 작업을 마칠 때마다 묶이지 않은 낱장의 인쇄본을 나누어 주었다. 

인쇄본을 얻는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또 남아 있었다. 그것을 각 권의 책으로 제본해야 했다. 이번에는 육체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한 달은 마실 수 있는 피아스코 병에 담은 붉은 키안티 포도주 세 병과 식초 한 병을 포기해야 했다. 


제본이 끝난 '로마사'를 받으러 가던 밤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의 육체가 건장한 17세로 무르익었을 때였다. 하지만 지혜와 통찰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나를 위해 어렵게 마련한 책이라서 그런지 아버지는 나에게 직접 완성된 책을 받아 오도록 시켰다. 나는 포도주 세 병과 식초 한 병을 바구니에 담아 제본업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깨끗하게 제본된 한 질의 책을 건네받았다. 건너가던 베키오 다리는 고단했으나 넘어오던 다리는 춤추듯 출렁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무거운 책들을 지고 오면서도 나는 마치 나귀라도 된 듯 무거움을 못 느꼈다. 책은 등에 붙어 있었으나 빨리 집에 가져가서 한 장 한 장 넘겨보려는 욕심에 벌써 품에 안은 듯하였다. 


나는 그 책들을 평생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책이라기보다는 스승이었고 친구였다. 나는 외로울 때 그들을 찾았고, 힘들 때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기쁠 때 함께 손뼉을 마주쳤다. 나는 그들에게서 세상을 배웠고, 지나간 시간을 들었으며, 다가올 미래를 예측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소중한 자식들을 안겨주었다. 나의 책 '군주론'도, '로마사 논고'도, '전쟁의 기술'도 모두 그들에게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렇게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것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던 지독한 가난과 인생을 같이 했던 책들이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책없는 부귀영화(富貴榮華)보다 더 소중하고 감사하였다.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