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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Mar 12. 2022

나의 소들을 소개합니다.-6

의과대학 교수의 일상

예상하셨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전보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저의 외래는 소란스러웠고, 잊을 만하면 드잡이를 하자는 분들이 생겨났습니다. 분명히 잘 배워서 그대로 실행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옆에서 보기에는 좋게만 느껴졌던 비법들이 사실 제가 직접 따라 해 보니 역효과도 나타날 수 있는 양날의 검같은 것이었더란 말입니다. 각각 어떤 효과와 부작용이 있는지 한 번 따져 볼까요?


-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항상 웃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이것은 분명 의사와 환자분들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입니다. 특히 신환으로 처음 제 외래에 오시는 환자분들에게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하면 대부분 저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좋은 인상은 신뢰로, 신뢰는 올바른 치료로,  올바른 치료는 만족할 만한 결과로 선순환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때와 장소를 보아가면서 해야 하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환자가 이렇게 아파 죽겠다는데 왜 그리 실실 웃는 것이냐? 비웃는 것인가, 아니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인가?" 혹은 "환자를 문 밖에서 몇 시간 기다리게 하더니 어렵게 진료실에 들어가니까 의사가 기분 나쁘게 웃고 있더라. 모욕당하는 느낌이었다."라고 시비를 걸거나 불만을 표시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한 가지 현상을 참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 시선을 잘 맞춘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으로 대화한다.

이것도 역시 아픈 환자분들을 위로하고 공감을 표시하는 데에 중요한 비법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의사가 오롯이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고, 인격적으로 대우받고 있다는 감정도 느끼게 하는 기분 좋은 행위이니까요. 그런데 의사는 외래에서 환자를 보면서 의무 기록지에 적어야 할 것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잘 기록되어 있어야 향후 환자의 증상과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파악할 수 있고, 치료의 과정도 계획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계속해서 환자분만 응시하다 보니 외래 진료 시에 의무 기록지 작성이 소홀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공감을 잘 표시하던 따뜻한 의사가 무슨 일인지 다음에 오면 자신의 상태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것을 보면서 환자분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신 것 같습니다. 초반에 형성되었던 저에 대한 신뢰는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차 무너져 갔습니다. 물론 불성실한 의무 기록지 작성으로 병원 측에서 경고를 받은 것은 덤이고요.


- 가족처럼 친밀하다. 어르신 분들이 오시면 마치 자식처럼 대한다. 심지어 가끔 반말도 섞는다.

의사는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두 동감하실 것입니다. 저는 의학적으로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지 환자분을 비슷한 연령의 제 가족이나 친척에 대입시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환자분들 중에는 직접적으로 "당신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한다면 실수할 일은, 특히 과잉 치료를 할 일은 많이 줄어들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환자를 자기 가족과 지나치게 동일시하다 보면 냉정하게 평가하고 과감하게 결정해야 할 경우 자칫 머뭇거리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 많은 의사들이 자기 가족이 아플 때에는 자신이 직접 진료하지 않고 신뢰할 만한 다른 의사에게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약해지게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혹시나 환자분들이 경험하시기에 '저 의사, 자기 가족 아니라고 너무 냉정하게 말하고 차갑게 대하는 것 아니야?'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의사가 옳은 결정을 내리고 최선의 치료 방법을 권유해드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지 출처: 강동경희대병원. '환자를 가족처럼' 이란 표어는 병원 광고 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문구 중 하나입니다.


- 몸이 쉬지를 않는다. 큰 동작으로 바디 랭귀지를 섞는다. 환자분들과의 대화 중 과장된 리액션을 보인다.

리액션은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느끼시겠지만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에 반응을 보여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대하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남녀 간에 연애를 할 때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요, (앗, 삼천포 경보) 이것은 심리학 실험으로도 증명된 것입니다. 남녀 간에 서로 호감을 느낄 때에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고, 강한 호응을 보이면서, 심지어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따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도한 리엑션은 거꾸로 이야기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더 호감가게 만드는 작용도 합니다. 그래서 한참 깨가 쏟아지는 연애를 할 때에는 도통 재미도 없는 얘기를 나누면서도 둘이서만 하하호호 좋아라 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애정이 식으면 '우리한테 그런 적도 있었던가?' 싶게 관심과 호응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고요.

이야기가 본론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행히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적절한 리액션은 자신의 증상과 고민을 말하는 환자분들에게 자존감을 살려주고 의사가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피드백을 주는, 대인 관계의 중요한 스킬입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치게 살가운 태도는 뜻밖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는데요, 이는 제가 경험한 실례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해가 잘 가시도록 약간의 MSG를 첨가하였습니다.


(어르신 환자분 입장)

의사: (일어나서 90도 폴더 인사) 아이고, 어머님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어르신 환자: (약간 부담) 목이 아파서 왔어요.

의사: (자신의 리액션에 자신이 취해서) 아, 맞다, 그러시구나..... 그런데 어머님은 어찌 이리 고우셔. 연세보다 젊어 보이셔서 깜짝 놀랐네.

어르신 환자: (부담 2배 획득, 한편으로는 기분 좋음) 아, 그런 말씀 마시고. 목 좀 낫게 해 주세요. 아파 죽겠어요. 앓느니 죽지.

의사: 아이고, 죽기는 왜 죽어. 죽고 싶다는 사람 치고 거짓부렁 아닌 사람 못 봤어. 그런데 비싼 검사 좀 해 봐야 해요.

어르신 환자: (이 자식이...) 무슨 검사를 해야 돼요? 너무 비싸면 안 할라요.

의사: (자기 어머니 혼내듯) 어머님이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근데 자식들 불효자 만들지는 마요. 검사 비싸다고 안 받으시면 나중에 자식들이 아픈 어머니 치료 안 해드렸다고 욕먹어요. 나는 몰라.

어르신 환자: (아니, 이 눔이 뭔 소리를 하는거여?) ... (보호자를 보면서) 아가, 어찌해야 한다냐?


뭐, 이쯤 되면 기분이 상당히 상한 표시를 팍팍 내십니다. 물론 같이 오신 며느리는 진료실 문을 나가면서 '과잉 진료를 권유하는 의사가 반말을 찍찍 해대더라.'며 병원에 보낼 '고객의 불만'을 이미 작성하고 계십니다. 의사는 곧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모르고 있겠지요. 의무 기록지는 아직 작성되지 않았고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는 채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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