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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Mar 19. 2022

나의 소들을 소개합니다.-12

의과대학 교수의 일상

3. 분명히 9시로 예약하고 갔는데 왜 10시에도 안 봐주나?

이런 불만들 많이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한 진료 대기실에서 환자들 틈에 끼어 한, 두 시간을 보내보신 분들이라면 말이지요.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닐진대 왜 약속한 진료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인지 말입니다. 우선 모든 대학병원 의료진을 대신해서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료가 늦어지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변명이지만요.


제 외래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미리 고백하자면 저는 외래 약속 시간을 무척 잘 지키는 의사 중 한 명입니다. 그래도 환자분들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지요. 왜 그럴까요?

환자분들은 외래 진료를 예약할 때 그 시간에 의사를 만나는 것으로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생각하는 예약 시간은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원활한 진료를 위해 환자분들이 최소한 그 시간까지는 와주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요?


보통 오래 대기해야 하는 경우는 그 의사를 처음 만나게 되는 신환일 때 더욱 자주 발생하는데요. 여기 '허리병' 씨라는 분이 허리가 아파 대학병원 정형외과에 9시에 진료 예약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허 씨는 의사를 9시에 만나고 여유 있게 진료 일정을 소화한 다음 11시에 병원 앞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워낙에 약속 시간에 민감하고 그 시간을 잘 지키는 분이라서 9시 예약이지만, 8시 50분경 진료실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접수대에 서있는 간호사가 신환 예진(예비 진료)을 해야 하니 그 방 앞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합니다. 자기보다 먼저 도착한 9시 예약 신환들이 있네요. 참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그이들 다음으로 약 20분을 기다려 예진실이라는 곳에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의사는 없고 간호사 한 분이 환자분의 병력을 사전 조사합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어떻게 아픈지, 가지고 있는 다른 병들은 없는지 등을 아주 자세히 물어보지요. 여기서 약 10분간 머물며 자신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역시 대학병원은 다르구나. 이런 것들을 철저히 물어보고..."라는 생각이 들지요. 의무 기록지 작성을 마친 간호사는 몇 가지 사전 검사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곳을 안내합니다.


정형외과 외래라면 보통 엑스레이를 미리 찍죠.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검사를 하기 위해 검사비를 먼저 수납해야 하고, 엑스레이 촬영실에서도 또 얼마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엑스레이는 왜 그리 많이 찍는지 검사 시간만도 최소한 10분 이상 걸릴 것입니다. 이래저래 검사를 마쳤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진료 대기실로 돌아오니 10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이제 곧 의사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대기 환자를 표시하는 진료실 앞 전광판에는 자기 이름이 뜨지를 않네요. 아마 검사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기 이름이 빠졌거나 자기가 돌아온 것을 몰라 차례가 넘어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진료실 앞에서 진료 업무를 도와주는 간호사 앞에 섭니다. 그 간호사는 다른 환자들을 안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그 앞에서 또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기다리기만 했으므로 이제 이력이 났습니다. 마침내 간호사에게 하소연할 수 있는 순서가 되었군요.


"저 '허리병'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9시 예약인데 방금 엑스레이를 찍고 왔습니다. 혹시 전산에 오류가 있어서 검사 마치고 온 것을 모르고 계신가 해서요...."

"아, 허리병님, 검사 마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엑스레이 결과가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또한 앞에 기다리시는 분들도 10분 정도 계시고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호명해 드리겠습니다."

간호사는 매우 친절하게 대답했지만 왜 그런지 슬슬 부아가 치미네요. 그래도 냉철하기로 소문난 우리 '허리병'씨는 아직까지 침착합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를 빠르게 계산하지요.

"대학병원 진료 시간은 3분이라고 했으니 내 앞에 기다리는 사람 10명이 진료를 모두 보려면 30분을 더 기다려야 하겠구나"라고 말이지요. 겨우 찾아낸 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눈을 감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허리병 씨는 놀라서 잠을 깹니다. 시계를 보니 10 40분입니다. 전광판을 보니 자기 이름이 없습니다. 아마 지나쳤나 봅니다. 낭패네요. 다시 진료실 앞의 친절한 간호사를 찾아갑니다. 물론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려야지요.

"저 '허리병'인데요. 아마 제 순서가 지나간 것 같아요.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제가 11시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조금 급해서 그렇습니다."

"아, 허리병님, 아니에요. 아직 순서가 되지 않았어요. 교수님 진료가 조금 지연되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호명해드릴 거예요"

그러고 보니 진료실 앞 전광판에 '상담 지연 30분'이라는 표시가 떠 있는 것이 보이네요. 한편으로는 순서가 지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하네요. 돌아서서 따지려고 하는데 바로 다음 환자가 대신 앙갚음을 하고 있습니다.

"여보쇼, 아가씨요, 내가 9시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는데 왜 이 시각까지 의사 코빼기조차 볼 수 없는 거요? 내가 여길 올라꼬 오늘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올라왔스요. 이게 다 뭐꼬. 무슨 병원이 이렇노?"(사투리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그놈의 의사 대신 당하고 있는 간호사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말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어서 속이 다 시원하거든요. 싸우고 있는 환자를 내심 응원하면서 다시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켭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네요.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https://www.insight.co.kr/newsRead.php?ArtNo=64366

허리병 씨는 곧 만나야 할 의사가 정신이상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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