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교수의 일상
허O병이라는 이름이 드디어 진료실 앞 전광판에 떴습니다. 요즘은 개인 정보 보호 때문인지 환자 이름의 중간자를 표시하지 않습니다. 계산해 보니 외래 접수에 도착하고 나서 벌써 2시간이나 지났습니다. 이제야 그 유명하다는 교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11시 친구와의 약속은 급하게 1시간 후로 연기하였습니다.
"허리병 님, 15번 진료실로 들어가실게요."
진료실 앞 간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합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러지 않았는데 눈물이 찔끔 날 정도입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웬 걸... 방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교수님 곧 들어오실 거예요."
"아, 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옆방에서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교수가 옆방에서 다른 환자를 보고 있군요. 그것을 마치면 이 방으로 건너오는 것 같습니다. 환자용 의자에 앉습니다. 컴퓨터 모니터가 여러 개 있네요. 그중에 두 개는 엑스레이들을 띄우고 있습니다. 허리 사진이 여러 장 보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허리일 테지요. 시간도 남으니 기념으로 좀 찍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화면에 보이는 엑스레이들을 찍습니다. 그때 갑자기 진료실 옆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옵니다. 교수인가 봅니다. 나쁜 짓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그런지 참 멋쩍네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교수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참으로 예의 바른 예쁜 말들이지만 영혼이 1그램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허리병 씨의 불만도 사그라들지는 않습니다. 교수가 컴퓨터 모니터의 의무 기록지를 한동안 쳐다봅니다. 이미 예진에서 간호사가 조사하여 작성한 것들입니다.
"아, 한 달 전부터 시작된 허리 통증으로 오셨군요. 오른쪽 다리로 뻗치는 방사통도 있고요. 정형외과 다니시면서 주사도 2차례 맞으셨고요. 당뇨를 앓고 계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다리의 통증은 주로 종아리 뒤쪽과 발바닥에 나타나는군요."
"네, 여기랑 여기가 저리고 아파요."
허리병 씨는 자신의 다리 여기저기를 만져가며 애타게 증상을 호소합니다. 담당 교수는 그것을 힐끗 보는가 싶더니 바로 엑스레이 화면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빠르게 엑스레이들을 넘겨 가면서 이리저리 살핍니다. 초시계로 재보지는 않았지만 약 10초 정도 걸린 것 같군요.
"아, 환자분은 4번-5번 허리뼈 사이 디스크 간격이 조금 좁아져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많이 안 좋은가요?"
"아니, 많이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럴리가 없는데요, 저는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아, 네. 엑스레이가 크게 나쁘지 않은 분들 중에도 가끔 증상이 심한 분들이 있습니다."
완벽주의자인 허리병 씨는 뭔가 좀 불안합니다. 참지 못하고 교수에게 부탁합니다.
"죄송하지만, 그게 제 엑스레이는 맞나요?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잘 봐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요즘 너무 불편해서요."
교수의 양미간이 살짝 찡그려집니다. 괜히 말했나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불안해서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교수는 계속해서 모니터를 응시합니다. 환자 정보를 확인하는 것 같군요.
"아,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충분히 자세히 보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네, 그런데 몇 번 허리뼈 사이라고 하셨지요?"
"네, 4번과 5번 사입니다."
허리병 씨는 수첩을 펼쳐서 들은 것들을 받아 적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심한 가요? 1단계부터 4단계로 나눈다면 몇 단계 정도인가요?"
"아, 그런 건 특별히 나누지는 않는데요."
"그렇군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네, 아무래도 허리 디스크가 의심되니 MRI 검사를 빨리 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수는 이번엔 의무 기록지가 떠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고 바쁘게 무엇인가를 입력하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허리병 씨는 불현듯 깨닫습니다. 이놈의 의사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료실에 들어와서부터는 계속 좌우로 펼쳐진 모니터만 바라보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는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치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를 보고 좀 크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네?"
교수가 깜짝 놀라며 쳐다봅니다. 덕분에 눈은 한 번 마주쳤네요.
"선생님 말을 알아듣기가 조금 힘들어서요. 제 병이 심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하고요."
"아, 네. 아직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허리 디스크가 있어도 별 증상 없이 좋아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니요? 자기는 지금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교수는 자기 병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역시 걱정했던 대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정신이상자일 가능성이 높군요.
"아, 지금 저는 너무 불편합니다. 좋아질 수 있을까요?"
"제가 오늘 드실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드시면서 MRI 검사를 하시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제가 다시 봐드리겠습니다."
"디스크를 없애는 약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진통소염제입니다. 디스크를 없애는 약은 없거든요."
"디스크를 없애지 않으면 계속 아플 것 아닙니까? 진통제는 그저 임시방편으로 아픈 것만 가리는 것 아닙니까?"
교수는 이제 싫증이 난 것 같습니다. 벌써 옆방으로 건너가려고 하는지 엉덩이가 들썩거립니다.
"그런 것은 아니고요. 일단 저를 믿고 약 드시면서 검사를 해보겠습니다. 결과가 나와야 더 자세한 상태를 알 수 있거든요. 검사 예약은 간호사님이 도와드릴 것입니다."
"MRI를 오늘 찍는 게 아닌가요? 멀리서 왔는데요. 검사하러 다시 와야 하는 건가요?"
"아, 네. 죄송하지만 검사 일정이 조금 밀려 있을 겁니다. 오늘 찍으시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진료를 마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궁금한 것들이 많거든요.
"설마, 벌써 끝난 건가요"
"네, 오늘 진료는 마치고 나머지는 MRI 결과가 나오면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교수는 짧은 눈인사를 하더니 옆방으로 사라집니다.
허리병 씨는 조용히 혼잣말을 합니다.
"뭐 저런 의사가 다 있어? 유명하면 다야? 2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이게 뭐야?"
불행하게도 짜증 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간호사의 검사 예약 일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녀는 아직도 바쁩니다. 허리병 씨 앞에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의 업무를 먼저 봐주고 있거든요. 약속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계속 옵니다. 이미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까요. 이윽고 차례가 왔습니다.
"허리병 님, MRI 찍기로 하셨지요? 죄송하지만 MRI 대기 환자분들이 많아서 예약이 좀 늦어질 것 같아요. 검사는 한 달 후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 약 처방전 받아서 약 드셔야 합니다."
"네, 검사가 한 달 후라고요?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도대체 환자 입장은 생각해 주는 겁니까? 그러면 외래는 언제입니까?
"네, 외래 일정도 밀려 있어서 2개월 후로 잡힐 것 같습니다."
"아니, 여보쇼, 아가씨....$#&&@#$%%^"
그다음 허리병 씨가 한 말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