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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Mar 20. 2022

나의 소들을 소개합니다.-15

의과대학 교수의 일상

앞 글에서 묘사한 상황은 약간 과장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외래에서 몇 번 경험했던 환자분들의 불평을 모두 한 자리에 몰아 놓았기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는 극도로 짜증 나는 장면들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대학병원 교수들 중에는 찾아오신 환자분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누가 봐도 불친절하다 느껴지는 분도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지요. 저는 어느 정도일까요? 


냉정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제 친구가 환자로 찾아와서 제 진료를 보게 된 것이었지요. 그는 학창 시절부터 냉정하기로 소문난 친구였습니다. 친한 친구라고 해서 선한 거짓말이라든지, 입에 발린 말을 해주는 적이 없었거든요. 진료를 마친 후 저는 그에게 제 진료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불만 사항은 없는지 피드백을 요청했습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너는 그냥 평범한 대학교수 정도야.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저는 제 나름대로 꽤 친절한 의사라고 자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던 것이지요. 복잡한 감정이 생기더군요. 세상에 친절한 의사가 예상외로 많다는 점에 안심이 되기도 했고, 저의 진심을 몰라주는 친구에게 서운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앞으로는 더욱 친절하게 환자분들을 봐 드려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의사도 일부러 환자들에게 불친절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자신이 친절하게 응대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지와 실제와의 괴리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우리 허리병 씨를 진료해 준 의사는 왜 그리 불친절하게 비쳐졌고, 왜 환자분을 그리 화나게 했는지 원인들을 따져 보겠습니다. 


4. 의사는 왜 항상 바쁜 척 하나?

외래 진료실에서 의사들을 보면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듯 하지요. 잠시 숨을 돌리고 환자에게 미소를 띠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적은 별로 없습니다. 할 말만 하고 필요한 정보만 들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문제는 '3분 진료'라는 제한된 진료 시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정책 상 3분 진료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첨부해 드린 글 참조)

https://brunch.co.kr/@osdlee/179


"그게 다 한 명이라도 환자를 더 봐서 돈을 더 벌려는 계산 속 아니냐? 그렇게 돈이 중요하다면 오래 봐주는 대신 진료비를 더 주면 될 것 아니냐? 진료비를 5배 올려서 주고 15분씩 보게 하면 어떠냐?" 

이런 의견을 주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15분으로 진료 시간을 늘린다면 환자분들은 5배 이상 늘어난 대기 시간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꼭 그 의사에게 보고 싶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환자가 계속 몰릴 경우에는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기회를 아예 못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밀린 일정 때문에 신환을 줄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료실 의사들이 항상 바쁜 또 다른 이유는 배정된 시간 안에 진료를 마치려고 서두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순서로 예약된 환자분들과의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다들 느끼시겠지만 의사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아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기분으로는 아무리 진료를 잘 받아도 의료진이나 병원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애는 쓰는데 욕은 더 먹는 상황이 만들어지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도 청년 의사 시절에는 어려운 환자분이나 위로가 필요한 환자분들이 오시면 진료 시간을 마구 늘려 봐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진료실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진료 예약 시간이 지연되면서 대기하고 계시던 많은 환자분들이 원성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괄괄하신 분들은 진료실 문을 쾅쾅 차기도 하십니다. 가벼운 욕설과 함께요.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배정된 진료 시간을 가급적 지키면서 할 말을 빨리 해드리려고 하게 됩니다. 설명도, 설득도, 위로도 아주 급하게 해 드릴 수밖에 없고요. 그것이 무척 사무적인 태도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진료실 의사의 머릿속에는 항상 초시계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허투루 쓰려고 하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눈빛이 항상 불안하고 여유 없어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글에서 제가 예약 시간을 매우 잘 지키는 의사라고 말씀드렸지요? 저의 진료 시 마음가짐이 이렇게 변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욕을 먹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적게 먹자는 계산이지요.


5. 의사는 왜 눈을 맞추지 않는가? 환자를 물건으로 보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의사는 환자를 쳐다보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항상 모니터를 바라보며 대답을 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사람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는 성격 장애라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이럴 것 같습니다. 진료 의사는 진료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새로운 환자의 정보를 가능한 한 빨리, 많이 얻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 정보들은 모두 모니터 안에 들어있습니다. 요즘은 의무 기록지도, 영상 의학 자료도 모두 모니터에 뜹니다. 그것을 잘 알아내야 환자분이 가지신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해드려야 할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결정되었다면 그 처방도 전산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키보드를 두드려서 컴퓨터에 처방이나 계획을 입력하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의사는 진료 시간의 대부분을 환자분보다는 모니터에 시선을 멈추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니터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는 것 아니야?" 

이런 걱정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귀는 항상 환자분들에게 열려 있거든요. 솔직히 멀티태스킹이 잘 안 되는 저 같은 의사에게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의사분은 진료실에 들어가면 항상 눈을 맞추고 웃으며 인사하더라. 괜히 그러지 못하는 당신이 핑계 대고 있는 것 아닌가? 자신의 모자란 인격을 시간 부족으로 둘러대고 있는 것 아닌가?"

네, 어떤 의사들은 환자분의 얼굴을 자주 바라보며 진정한 의미의 상담을 해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사들과의 진료 시간을 한 번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들 옆에 전산 입력을 도와주는 분들이 따로 계시지 않던가요? 전공의 등 초급 의사나 아니면 간호사 말입니다. 가끔 키보드에 익숙하지 않으신 연세 있는 의사들은 이런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진료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은 전산 시스템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마음껏 환자와 감정 교류를 하면서 진료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병원 인력이 고급화되고 부족하여 그렇게 지원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전혀 없이 혼자서 진료를 보면서도 환자분의 눈을 응시하며 대화하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전산 시스템을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출중한 능력을 가진 분들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렇지 않다면 환자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기를 포기하거나 의무 기록지를 부실하게 작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한 동안 시도했다가 포기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그래도 환자분들을 자주 바라보며 말씀드리는 의사입니다. 모니터를 보는 중간중간 환자분들의 눈을 잠깐이라도 보려고 일부러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환자분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할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환자분들도 의사들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상이나 불편함에 대한 정보를 준비해 오셔서 조목조목 풀어놓으시지요. 그러나 그중에서 정작 중요한 정보는 얼마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사는 환자의 말을 끊고 자신의 질문을 먼저 하곤 합니다. 이것도 환자분의 기분을 꽤 상하게 하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의사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필요한 정보를 잘 전달해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진료 전에 문제점이나 궁금한 점을 미리 적어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이렇게 준비해 오시는 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너무 자세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벌어집니다. 사람은 6개 이상의 메시지가 입력되면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의사도 사람이니까 마찬가지이지요. 순간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자분의 증상이나 질문을 적어가실 때에도 가장 중요한 3-5가지 정도를 정리해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자세히 기록하셔야 한다면 3-5가지 정도의 중요한 사항에 표시를 해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계속)


* 제가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았었는데 그것들을 잊고 글을 쓰고 있으니 조금 힐링이 되는 듯합니다. 이런 글은 특별히 자료 조사도 필요하지 않아서 그저 담담히 써내려 가기만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요즘 왜 이리 글을 많이 올리나?' 하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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