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은 얌전하게
교수님과 나는 말이 잘 통했어요. 평소에 존경하던 분이었고 그분도 저를 예뻐하고 계셨던 것 같았어요. 하긴 제가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니까, 그리고 수업 시간에는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고요. 눈에 안 띄면 두각을 나타낼 일도 없지만, 뭐, 눈 밖에 날 일은 더더욱이나 없겠죠. 인생을 살다 보면 호의에 따른 우대보다는 악의에 찬 홀대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더라고요. 특히 공적인 관계에서는요.
“나도 고등학교 2학년 딸이 하나 있네. 그 애도 도희 학생처럼 컸으면 좋겠군. 예쁘고 똑똑하고 자신감도 있는 그런…”
이 정도면 최고의 찬사 아니겠어요?
“과찬의 말씀이세요. 모르셔서 그렇지 부족한 게 많아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원하고 있는 조교 자리에 한 발 더 다가간 것 같았어요. 그날은 미스 하이드의 도움 없이도 일이 꽤 잘 풀린다고 생각했죠.
교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남학생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다가왔어요. 그들이 교수님 옆에 앉은 나를 부러워하는 건지, 내 옆에 앉은 교수님을 부러워하는 건지 알 수 없더군요. 그리고는 술잔을 교수님께 한 잔, 나한테 한 잔씩 권하는 거예요. 같은 학생인 나에게 술잔을 권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따지지 않고 받아줬어요. 교수님에게 원하던 평가를 들어서 긴장이 조금 풀어졌었나 봐요.
술만 마시고 일어나면 내일부터 당장 아쉬울 건 학생들밖에 없었어요. 장래에 대한 언질을 받고 부탁을 드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까요. 앞으로 교수님과 개인적인 약속 잡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따라서 마치 아이돌 가수 팬 사인회 하듯이 교수님 앞으로 장사진이 쳐졌지요. 내가 자리를 잠시 피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귀띔을 들었으니 다른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슬그머니 일어나서 건너편 테이블로 넘어갔어요. 친한 친구 몇 명이 앉아 있더군요. 들뜬 기분에 술잔을 나눴어요. 미스 하이드가 느릿느릿 깨어나더군요.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어느새 테이블의 분위기는 미스 하이드가 틀어쥐고 있었고, 친구들은 그녀의 일인극에 완전히 빠져 있었어요. 개구진 남학생들도 미스 하이드의 얘기에 심취해서, 또 그 녀석의 통통 튀는 매력에 빠져서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하고 있었어요. 따분한 내가 그 벌어진 입속으로 주먹을 넣었다 빼도 모를 지경이었다니까요.
그러다가 건너편 자리의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죠.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어요. 이제는 그 많던 민원도 모두 해결하신 것 같았어요. 잠깐, 나도 미스 하이드의 수다에 너무 몰두했었나 봐요. 이제 조심해야죠. 교수님이 손짓해 나를 불렀어요. 대화에 정신 팔린 미스 하이드를 친구들과 떼어놓느라 시간이 좀 걸리더군요.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교수님 옆으로 돌아갔어요. 그러자 교수님이 소곤소곤 말씀하시더군요. 남들이 들을까 봐요.
“아까, 그 얘기 말인데 도희 학생이 내 밑에서 대학원생을 하면 어떨까? 물론 조교도 하면서.”
“네?”
이런 제안은 2학기 초에 하지 않아요. 보통 학기 끝나갈 때쯤, 서너 명의 경쟁자 속에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한 명을 낙점한 후 조용히 불러서 통보하죠. 그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죠. 그냥 나를 콕 집은 거예요. 얘기가 너무 쉽게 끝나버리는 거죠. 그날은 지도희가 큰일을 해낸 것이었어요.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호호호”
고개를 디밀며 기어오르는 미스 하이드를 겨우 주저앉히고 내가 대답했어요
“그럼 같이 한잔할까? 뭐든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해.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게.”
이제 술자리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어요. 교수님도 처음 만나는 미스 하이드의 낯선 매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르시더라고요. 하지만 슬슬 좀 위험할 수는 있어요. 녀석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대학원 입학 제안도 받았으니 그날은 아주 성공적인 하루로 정리해도 될 것 같았어요. 찌질이 남학생들은 미스 하이드에게 추파의 눈길을 보냈어요. 그 녀석도 나온 김에 좀 더 눌러앉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인제 그만 말려서 데리고 가야 했어요. 그들은 탄력 받은 미스 하이드가 같이 가주기를 바랄 테지만 말이죠. 조용히 물을 따라 마셨어요. 그래야 혈중 알코올 농도가 낮아져서 미스 하이드를 조금 누그러뜨릴 수도 있거든요.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 어렵사리 길들이는 법도 좀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교수님의 맺음말과 함께 마칠 시간이 되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