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녀석은 신용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카드를 일시 정지시키고 있었다. 관리실에 들러 그 직원을 찾으면 될 텐데, 갑자기 왜 카드를 정지시키는지 의아했다.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준비했던 일이라는 듯 너무나도 익숙하게 일의 순서를 정해서 묵묵히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폐 몇 장을 꺼내 세어 보지도 않고 나에게 건넨다.
‘아버지, 여기 현금 좀 가지고 계시고, 일단 제 카드 쓰세요.’
“아니다. 내가 다른 지갑에 돈이 좀 있으니 그걸 쓰면 된다. 괜히 너희들 귀찮게 하는구나.”
‘아니에요. 다시 발급받으면 되죠, 뭐. 잃어버린 돈도 얼마 되지 않으니 잊어버리세요. 곧 집안 어딘가에서 나올 거예요. 그리고 혹시 모르니 자물쇠 비밀번호는 제가 오늘 바꿔 드릴게요.’
“어쨌든 출발하기 전에 관리실 좀 들르자꾸나. 말은 해놓고 가야지.”
‘오늘 토요일인데 관리실 직원들이 출근하겠어요?’
아차 싶었다.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내 나이가 되면 그날이 그날 같으니까. 젊은이들에게는 하루가 짧고 1년이 길지만 늙은이들에게는 하루가 한없이 지루하고 1년이 눈 깜짝할 사이이다. 그렇게 긴 하루라지만 그날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벽에는 여러 달도 아니고 오직 그 달의 날짜들만이 적혀있는 달력이 붙어 있다. 친절하게도 평일은 검정색, 토요일은 파란색, 일요일과 공휴일은 빨간색의 숫자로 표시된 하얀 바탕의 큼지막한 달력. 날짜들은 네모난 칸에 나뉘어 들어있고 큰 숫자 밑에는 음력 날짜와 십이지간의 동물들도 앙증맞게 그려져 있다. 그렇게 필요 이상의 많은 정보들을 보여주는 달력을 매일 쳐다보면서도 그저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하릴없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무엇인가 행동에 옮겨야 한다. 나는 탁자 위의 노트 한 장을 찢어 사인펜으로 꾹꾹 글자들을 눌러쓰기 시작했다.
‘관리실장님 전,
안녕하세요, 803호 주민 김병준올시다. 오늘 새벽에 제 집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고동색 가죽 지갑을 분실했습니다. 지갑 안에는 약간의 현금과 노란색 카드 열쇠, 파란색 하나은행 신용카드가 들어있습니다. 두 달 전에 실장님 찾아뵙고 말씀드린 직원이 오늘 새벽에도 제 집에 들른 것 같아 문의하려고 하니 이 메모를 보시는 즉시 저에게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병준 배’
분노는 컸지만, 문체는 정중하다. 나이가 들수록 분노를 한 풀 삭이고 표현하는 법을 알아간다. 분노를 분노로 표현하면 돌아오는 것은 싸움밖에 없다. 분노를 해결하려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그 분노를 드러나지 않게 감춰야 한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아들 녀석과 함께, 잠겨진 관리실 문에 메모를 붙이고 돌아섰다. 오늘은 집에 가져갈 짐이 많다. 석 달 사이 날씨가 많이 포근해져 두툼한 겨울옷들을 봄옷으로 바꿔와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도 다듬고 목욕탕도 들러야 한다. 하지만 아직 해는 그리 길지 않다. 서둘러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