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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Jan 11. 2022

언제나 후회는 남는 것.

지난 11월에 심은 튤립과 히아신스, 수선화 구근들. 1월이면 싹이 뾰족 거리며 올라온다. “나 잘 살아있다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안부인사를 전해준다. 무척 반갑다. 올해 구근 농사가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많은 구근을 심다 보면 사실 어디에 심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구근을 심을 때는 같은 종류의 구근을 밀식해서 화분 가득 빽빽하게 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구근을 모아서 심기도 한다. 


다른 종류의 구근을 모아 심으면 어우러지는 모습이 더 꽃밭 같기도 하다. 


그리고 길이가 깊은 화분에 수직으로 겹치지 않게 지그재그로 차곡차곡 포개어 심기도 한다. 꽃대가 지면을 박차고 올라올 공간만 확보되면 흙 속에서 뿌리는 알아서 뻗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구근 심어둔 화분 몇 개를 살펴보다가, 느낌이 쎄한 화분이 있다. 싹이 난 요것보다는 더 많이 심은 것 같은데… 왜 싹이 이것뿐일까. 내가 아무리 어데 몇 개를 심었는지 기억이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이런 점 때문에 심을 때도 약간 망설였었다. 구근의 몸통을 절반쯤 지면 위로 내어 놓고 심을지, 구근 몸통 전체를 흙 속에 심어버릴지 고민했다. 


절반쯤 지면 위로 내어 놓으면 싹이 올라오지 않는 구근이라도 싹이 시작되는 지점이 보이기 때문에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겨울 추위에 구근 몸통이 노출되어 얼어버릴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서울에서는 영하 5도까지 월동이 된다고는 하지만, 깜빡 기온 체크를 놓치거나 하면 직장에 나와 있는 하루 종일 신경 쓰인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흙으로 다 덮어버리는 걸 선택했다.


싹이 안 올라올 때의 불안감은 어쩌나.

간단하다.

파본다


수상한 화분의 겉흙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어냈다. 싹이 혹시나 만져질까 싶어 손가락 끝의 감각을 한껏 살려서 흙을 삭삭 긁어냈다. 싹을 피해서 긁어내다가, 조그마한 튤립 싹의 뾰족한 면이 손가락에 닿으면 흐뭇하다. 싹을 확인했으니 멈춰도 되겠지만,  정도 흙을 긁다 보면 멈출 수가 없다. 흙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너무 좋고, 뭔가를 캐내고 파내는 희열감에 빠져든다.


그래서 그 작은 싹의 둘레를 삭삭 긁어낸다. 긁어낸 흙을 신문지를 깔고 살살 털어낸다. 화분에 식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런 짓이 식물 생장에 도움이 안 될 걸 알지만, 어쩌나. ‘멈출 수가 없는 걸.’ 긁어낸 흙 일부를 덜어내고 나니 “찾았다. 요놈!”


다들 조매난 싹이 올라왔는데, 싹이 날 기미도 없이 수상하게 누런 색의 구근이 있다. 싹이 올라오는 그 구멍에 흙만 잔뜩 끼어 있다.


구근을 살짝 건드려본다. 아래에 뿌리가 났다면, 어지간한 힘으로 건드려도 전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근데 얘는 약간 힘줘서 밀었는데 술렁 들려 일어난다. 


일단 몸통의 곰팡이. 몸통의 곰팡이는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상한 부분은 깎아내고 꽃이 나온 적도 있다. 그런데 구근 싹 나오는 입구가 푸르딩딩하니 약간 짓무른 걸 보니 구근 속이 썩은 것으로 추정된다.


멀쩡하게 싹이 올라온 구근도 파본다. 비교를 해봐야 하니까. (사실 싹 아래가 궁금해. 파보고 싶어서 안달 났다.)


역시! 뿌리가 복슬복슬하다. 아직 싹이 작고 뿌리도 많이 뻗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나와야 정상이다. 구근 몸통도 곰팡이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다.

“잘 자라주고 있구먼!”







둘을 놓고 비교해보니 확실히 때깔부터 다르다. 얼른 다시 심어야겠다. 썩은듯한 구근을 칼로 뚝 잘라 해부해보고 싶지만, 어쩐지 다시 흙 속에 심어볼까 싶다. 혹시 모르니까. 


구근이 썩었다고 옆의 구근에게 병을 옮기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해로울 건 없다.


다음부터는 구근 몸통 반쯤 지면 위로 심어야겠다. 그리고 추울 때는 바크 같은  사서 위에 살짝 덮어줘야지. 그러면 싹이 궁금할 때마다 바크만 겉어 보면 되겠다.



이번엔 좀 후회가 된다. 두 가지 방법을 나눠 심어볼 걸 그랬다. 

구근을 3년째 심어 키워보면서 경험과 노하우가 자란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정원사가 되기 위해 훈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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