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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Jan 09. 2022

비 온 뒤 숲으로 가자.

부모님 댁에 다녀오면 어쩐지 물에 푹 절은 스펀지가 된다.
어떤 거대한 우울이 나를 덮치는 기분이다. 

보통 금요일 퇴근 시간에 바로 기차를 타고 2박 3일간의 주말을 부모님 댁에서 보내고 일요일 오후 시간대 기차로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신경은 날카롭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다. 특히 내 가족은 나에게 편한 사람들이 아니다. 참고 참다가 꼭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에 못 참고 터지고 만다. 내가 부산역에 갈 때 엄마는 꼭 따라온다. 바래다준다는 것인데, 나는 그리 반갑지 않다. 혼자 있고 싶은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 해갈 때쯤인 것 같다.


엄마가 약간의 잔소리만 해도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온다. 누군가로부터 강요당하는 걸 못 견디고, 작은 일이라도 내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성격이다. 엄마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엄마에게는 더욱 그런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다. 엄마가 편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성격도 나랑 똑같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 딸이니 물려받은 거겠지. 엄마는 엄마대로 엄마의 의지와 결정을 잘 꺽지 않는다.


오늘은 부산역에서 엄마가 자꾸 무슨 빵을 사란다. 나는 그 빵을 좋아하지도 않고, 사가면 먹지도 않을 것 같다. 두 번 정도 웃으면서 “안 사도 돼. 안 먹을 것 같아.”라고 말했는데, 세 번 네 번 말씀하신다. 세 번째는 대답을 안 한다. 나름대로 참는다. 네 번째는 손바닥을 쫙 펴서 엄마 눈앞에 들이밀면서 “엄마 그만!”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말았다. 엄마는 그제야 눈치를 챈다. “알았다. 이제 사라고 안 할게.” 민망해진 엄마는 입을 삐죽 내밀며, 이렇게 끝난다.


   참았어야 하는데…’ 참고 참고 참다가 마지막 헤어지기 직전에 그래 버리고 나면, 내내 마음이  좋다. 두 시간 조금 넘는 기차 시간 동안 숨겨두었던 우울감이 서서히 올라오다가 나를  덮친다. 못난 나를 가족 곁에 있으면 더욱 발견하게 된다. 서울역에 기차가 서면, 미뤄둔 숙제를 마친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봇물 터진 우울이 마음껏 내 안에 활개 치게 내버려 둔다. 


한없는 우울에 휘청거려본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그 시간을 감당하지도 못했다. 지나고 보면 우스워질 짓을 거칠 것 없이 했다. 술을 먹고 네 발로 기어 보기도 하고, 회사에 갑자기 아프다며 휴가를 던져 버리기도 했다. 혼자인 시간 동안에는 내 우울에 아무도 거칠 것이 없다. 그렇게 질서 없는 시간을 한동안 보내고 나면 어느새 위기감이 우울감을 밀어내고, 그 위기감의 힘이 나를 일상으로 돌려놓는다. 위기감에 또 허덕이다 보면 일상이 밸런스를 찾게 된다.


다년간 경험으로 이런 방법은 에너지 소모가 컸다. 그리고 불필요하게 잃는 것도 생긴다. 적절한 시기가 있는 일에 후회를 남기게 되기도 하고, 우울에 흥청이는 시간 자체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위기감에 허덕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자책을 한다. 여러모로 생산적이지 않다.


몇 년 전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서른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는 내 인생을 규칙을 만들어갔다. 

예를 들면,


“기쁠 때는 실제 기쁜 것의 반만 기뻐하기”

-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라 기쁠 때 실제 기쁜 것보다 몇 배로 기뻐하기 때문에, 나만의 감정 컨트롤 방법


“배고플 때는 일단 두유 한 팩이라도 사 먹기”

- 나는 배고픔을 잘 못 견디고 배고프면 짜증이 심하게 때문에 일단 뭐라도 위를 채워야 엉뚱한 결정을 하지 않는다


이번과 같은 경우에도 규칙이 있다.

“우울감이 요동칠 때는 가만히 있기”


우울하면 나는 부산스러워진다. 몸은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서도 핸드폰도 끝도 없이 게임을 하거나, 계속 유튜브를 돌려댄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안 해도 될 말이 많아지고, 그러다 말 실수도 한다. 비 생상적인 일을 끊임없이 하고, 머리와 마음을 쉬게 하지를 못한다. 이런 식으로 우울로부터 도피처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식물을 가장 많이 모아둔 방으로 간다. 가습기를 가장 강력하게 틀고, 밀랍으로 만든 작은 초를 켠다. 잠시 방문을 닫아둔다. 잠시 후면 방안에 습기와 밀랍초의 옅은 꿀 향이 방을 은은하게 채운다. 평소 같으면 파라핀 향초였겠지만, 오늘은 귀한 밀랍초를 선물로 받았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 냄새도 올라오는 것 같다. 식물과 초를 바라보면서 잠시 가만히 있는다.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촛불을 바라보기도 하고, 식물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가만히 있어본다. 흰 벽에 일렁이는 식물 그림자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럴 때 내 정원이 있었다면, 정원을 거닐기만 해도 될텐데. 집 근처에 조그만 숲이라도 있다면 좋겠다.


이 방법이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았다. 아직도 우울감이 심하면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이 규칙을 따른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 보면, 배도 고파지고, 샤워도 하게 되고, 빨래도 하게 된다. 조금만 가만히 있다보면, 일상이 별로 손상되지 않고 회복된다.


언젠가 비 온 다음  숲에 갔던 기억으로  규칙을 만들었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나무와 흙이 내뿜는 축축하면서 청량한 에너지가 있다.  향을 몸속 가득 채우고 나면, 나는 매우 가벼워진다.  경험 이후부터는 비가 오면 그다음 날이 무척 기대된다.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늘 숲에 갈 수 없으니, 인공적으로 “비 온 뒤 숲”을 고안했다.
가습기, 식물, 거기다 촛불을 더한 응급처치.

이제 저녁을 먹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일찍 잠을 자야겠다. 기분은 어차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시소 같은 것일 뿐 영원하지 않다. 나의 본질을 기분이 좌우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분이 힘든 그 순간만 지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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