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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Aug 10. 2022

생활계획표를 짭니다

[나의 인지행동치료 노트]

퇴근시간, 검은 물체들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끄트머리에 있는 사무실에서 지하철역을 향해 내려내려가는 . 여기저기서 검은 머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느 골목에서  무리의 검은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어느 골목으로 검은 무리들이 미끄러지듯 사라지기도 하는 모습.


어느 걸음엔가 나도 둥실 대는 검은 물체들의 그룹에 스르륵 합류해서 둥실둥실 몸을 맡겨 본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사이 어깨를 또는 가방을 부딪히지 않으려 내 한 몸을 웅크려 자리를 잡는다. 길을 건너면서도 마주오는 사람과, 혹은 뒤에서 서두르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 본의 아니게 어깨춤을 춘다.


검은 머리들은 홀린 듯 지하의 구멍으로,
구멍으로 향하고, 그 구멍으로
쏙쏙 사라진다.

  

만원 지하철의 사람들 틈에 몸을 누인 나를 바라본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친 듯 체념한 듯, 세상만사에 의욕 없는 얼굴인 것은 분명하다. 회사에서의 성취나, 회사에 있는 짝남을 생각하면서 회사생활이 셀레고, 퇴근길이 뿌듯한 때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지나버렸다는 표정의 10년 차 직장인.


나는 왜 살까?  

이 질문을 꺼내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질문하지 않고는 못 사는, 나라는 사람. 답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방황을 한다. 이쯤 되면 방황하기 위해 이 질문을 주기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나도 내가 의심스럽다. 왜 살긴, 왜 살아. 그냥 사는 거지.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고, 죽기로 결심하지 않았으니까 사는 거지.

 

(넌 아직도 그 소리냐? )


하지만 나는 요즘 "왜 살까 병"이 또 도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해봤자 의미 없을 것 같다. 회사일은 책임감과 자존심에 꾸역꾸역 해내지만, 이 놈의 회사 때려치울까 또는 새로운 취미를 가져볼까 등등 잡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답을 알면서도 한숨 푹, 고개 푹. 그럴 때가 있었다. 현대인들의 번아웃 증상이니 뭐니 말하지만, 잘은 모르겠다. 나의 경우에는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고갈된, 그런 상태라기보다는 마음의 문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길게 몇 달을 방황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 질문의 답을 알기 전 일이다. 답을 알고 나서는 답이 있는 고민은 그만두자는 마음으로 빨리 방황을 그치게 되었다.


하지만 깨달음이 와도 무기력증이 고쳐지지는 않았다. 관성이 무섭다. 무기력도 관성이 생긴다. 갑자기 불끈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에는 뭔가, 무기력했던  자신에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동시에 그런  자신이 불안해진다. 불안한 머리 속이 그대로 반영되듯 행동은 부산스럽다.


  조금 읽었다가, 티브이 조금 봤다가, 스트레칭 조금 했다가... 그런 식으로 찔끔찔끔 시간을 흘려보낸다. 러가 12시가 되어 졸린 눈을 비비면서 오늘도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죄책감을 가득 안고 잠자리에 든다. 쉬이 잠이 들지 않는다. 그다음 날도 피곤한 검은 머리를 이끌고 지하철역으로 간다.


이럴 때 나는 생활계획표를 세운다. 어릴 때 방학이 시작되면, 지키지도 않을 생활계획표를 정성 들여 만들었다. 계획표를 만드는 상황 자체를 즐겼고, 색색이 색을 입히는 시간이 즐거웠다.


놀더라도, 운동을 하더라도,
티브이를 보더라도
계획을 세워서 계획대로 한다.

어떤 때에는 어떤 책을 볼지, 어떤 미드를 볼지, 어떤 운동을 할지까지도 세세하게 정한다. 하지만 이때의 생활계획은 절대 빡빡하면  된다. 무기력에 잠식당한 나를 정상 궤도로 올려놓기 위한 중간 단계이기 때문이다. 어릴  방학 생활 계획표와 달리,  생활계획표는 그 계획을 지키는 것 자체만으로 작은 성취감을 맛보는데 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아직은 망가지지 않았다' 걸 나 스스로 깨닫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그날의 계획 또는 길어도 1주일 치 정도만 계획을 세운다. 내 경우에는  1주일이 넘어가면 이것조차 스트레스가 된다. 지키기도 어렵고, 지킨다 해도 스트레스가 성취감을 갉아먹어 버린다.


그렇게 하다 보면 1주일이 안되어 보통 때의 욕구가 돌아온다. 생활계획표가 없어도,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쉬는 것도 방황하고 그런 일 없이 평온하게 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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