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지행동치료 노트]
알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세가 있으시지만 지병이 있는 분은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언론에서 정치인들의 생애에 대해 “영욕의 세월”을 살다 간 사람, 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 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꼭 그 말이 떠올랐다.
신이 내린 침술가로 칭송받으며 유명했다. 그리고 몇 해 전 그분의 침술로 아이 하나가 세상을 떠나 책임을 지고 옥살이를 하셨다. 여기서 침술이 무허가라거나 불법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를 살리려 한 것이지 죽이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게 한 건 맞지 않냐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면허가 있는 의사가 사람을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방패가 되어줄 면허도 없으면서 사람을 살리려고 나섰다는 것이 더 어리석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들려온 소식에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에 이끌려 다니다가, 벌떡 일어나 베란다 텃밭으로 나간다.
강원도는 이제 슬슬 일교차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틀 전 김장용 열무와 배추 씨앗을 뿌렸었다. (물론 내가 김장을 하기 위해 심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열무씨와 배추씨앗이 김장용이라서 하는 말일뿐이다.)
벌써 싹이 이만큼이나 올라왔다. 떡잎들 사이로 본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싹들도 있다. 1주일 뒤 정도면 솎아내거나 옮겨심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언제 씨앗을 뿌렸고, 언제 첫 새싹이 나왔고… 등등을 기록하고 체크하지 않는다. (사실 씨앗을 이틀 전에 뿌렸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꼭 그래야 하는 일이 아니면 세밀하게 체크하고 기록하는 방식은 내 성질에 맞지도 않고, 차라리 매번 놀라워하며 감탄하고, 순간순간 기특해하며 기뻐하는 것이 체질에 맞다. 이틀 전인지, 일주일 전인지 씨앗 뿌린 날을 기억하지 못해도 씨앗이 새싹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는 게 나는 무척 즐겁다.
검지 손가락으로 작고 여린 새싹들을 어루만져본다. 여린 잎들이 가진 촉촉한 생기가 손끝에 전해진다. 떠나간 누군가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생기 가득한 새싹들을 어루만지니 묘한 감정이 든다.
빈 화분에 흙을 담고, 가지고 있는 허브 씨앗을 더 뿌렸다. 노는 화분과 흙이 있으니 왕창 뿌렸다. 다음 주면, 새싹이 뾰족 뾰족 올라오는 모습을 왕창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어딘가 허기 진 듯한 마음을 채우는 경향이 있다. (폭식을 하거나 충동적인 쇼핑을 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행동에는 설령 후회가 따라붙더라도 크지 않다.
누구나 어떤 때는 성공하고 어떤 때는 실패한다. 항상 이기고 싶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이기면 오만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항상 지면 패배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지도 모른다. 그러니 인생은 누구라도 항상 이기게 두지도, 항상 지게만 두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고운 새싹들도 건강한 성체가 될 수도 있지만, 성체가 되지 못하고 이지러질지도 모른다. (또는 성체가 되어 내 배 속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늘 이기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늘 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인생이란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인생은 그렇게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