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
A라면회사의 R 이사가 라면 신제품 개발을 위해 베트남 출장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고수가 듬뿍 들어간 쌀국수를 먹고 고수를 이용한 기막힌 라면 스프를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회사에 돌아와 기획서를 마련해 제출했지만, 신제품으로 채택되지는 못했습니다.
고수라면 아이디어가 너무 아까웠던 R 이사는 몇 년째 공무원 시험을 낙방하던 친동생을 대표이사로 하여 B라면회사를 만들고, 개인 자금과 A 회사에서 쌓은 노하우를 쏟아부어 "만약에 고수라면"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B라면회사는 사실상 R 이사의 1인 회사나 마찬가지였지요. B라면회사가 개발한 "만약에 고수라면"은 국내에서는 물론 아마존에 입점하며 동남아와 미국까지 대박이 났습니다.
그제야 A라면회사도 부랴부랴 R 이사가 제출했던 먼저 쌓인 고수라면 기획서를 다시 꺼냈습니다. 그제야 기획서의 고수라면이 B라면회사의 "만약에 고수라면"과 레시피부터 이름까지 너무 흡사하다는 걸 발견했어요. A라면회사는 R 이사가 의심스럽습니다.
A라면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R 이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상법은 이사의 지위에서 획득한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해 상충을 금지하는 의미에서 아래와 같은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상법 제397조의2(회사의 기회 및 자산의 유용 금지)
① 이사는 이사회의 승인 없이 현재 또는 장래에 회사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회사의 사업기회를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 경우 이사회의 승인은 이사 3분의 2 이상의 수로써 하여야 한다.
1.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거나 회사의 정보를 이용한 사업기회
2. 회사가 수행하고 있거나 수행할 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업기회
② 제1항을 위반하여 회사에 손해를 발생시킨 이사 및 승인한 이사는 연대하여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이사 또는 제3자가 얻은 이익은 손해로 추정한다.
R 이사의 고수라면 아이디어는 A라면회사의 신제품 개발을 위한 베트남 출장길에 쌀국수를 먹다가 떠올랐으니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고수라면"은 그 정보를 이용한 사업기회에 해당되겠지요. B라면회사는 A라면회사와 같이 라면을 제조·판매하는 동종업계의 회사라는 점에서 "회사가 수행하고 있거나 수행할 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회기회"에도 해당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R 이사는 회사의 기회 및 자산을 이사회의 승인 없이 유용한 사람에는 해당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R 이사는 A라면회사에 손해배상을 하거나 이사에서 해임되거나 형사상 배임죄의 책임을 지게 될까요?
하지만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사로서 사업기회를 회사에 먼저 제공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개시하였다면 그 사업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법리가 확립되어 있습니다(법은 참 절묘하지요? 법은 충돌하는 두 입장 사이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아나갑니다).
R 이사가 A라면회사에 먼저 고수라면 기획서를 제출했으니, 꼭 R 이사가 상법을 위반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R 이사는 이사의 경업금지의무와 같은 다른 상법상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유능한 변호사는 내 의뢰인을 방어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양 당사자의 입장을 모두 생각하지요.)
R 이사는 A라면회사에 대해 미래에도 계속해서 함께 발전해나가려는 미래의 그림자가 있었을까요?
R 이사의 A라면회사에 대한 미래의 그림자가 짙고 길었다면, R 이사는 B라면회사를 만들어 "만약에 고수라면"을 출시하기보다는, A라면회사에서 자신의 기획을 받아줄 수 있도록 다른 기회를 만들었겠지요. 반대로 미래의 그림자가 없다면, 과감하게 A라면회사를 퇴사하고 "만약에 고수라면"을 자기 이름으로 출시하는 게 이상적이었겠습니다.
[뜬금 있는 한 컷 : R 이사가 "만약에 고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