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
법을 공부하고 법으로 먹고살면서 법이란 것이 참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으면서도, 때로는 상식과 참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나는 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라는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최근의 50억 클럽 판결을 떠올리면서?) ‘나는 법이 상식과는 멀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오늘은 법을 사랑하는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최근 판결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2013년 8월,
최경환 당시 의원이 당시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에게 "내가 결혼까지 시킨 괜찮은 아이네."라며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 인턴의 정규직 채용을 청탁했고, 박 전 이사장이 합격 점수에 미달하는 이 인턴의 점수를 조작해 채용되게 한 사건입니다.
정말 허탈하지요? 제가 바로 저 시기에 저 기관의 채용을 준비하다 낙방한 사람이었다면, 그 허탈감과 분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합격 점수에 미달한 사람을 합격시켰다면, 저 인턴을 합격시킨 바로 그 자리가 내 자리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근 바로 그 최경환 전 의원에 대해서 1•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 직권남용죄 및 강요죄에 대해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한편, 최경환 전 의원의 요구에 협조하여 위법한 채용을 한 중진공 전 이사장 및 운영지원실장은 2017년 5월 업무방해로 각각 징역 10월이 선고되어 법정구속되었습니다.
‘징역 10월이 엄한 처벌인가' 싶으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이들이 자백하고 정권의 실세인 국회의원의 외압을 물리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음에도 집행유예가 선고되지 않고 실형을 선고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는 엄히 처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채용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결국 채용을 해준 사람들은 유죄,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무죄.
법원의 이번 무죄 판결, 납득이 되시나요?
잘 납득이 안 되시지요? (흥! 이게 법이야? 이게 나라야?)
힘 있는 국회의원이라서 무죄로 빼줬나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법원 판결의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날까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그럴 것 같습니다.
채용 청탁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무죄라고 판단한 점 하나.
청탁을 받아들여 채용한 사람은 처벌되고, 채용을 청탁한 사람은 처벌되지 않았다는 점 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 직권남용죄의 대법원 판례가 그렇습니다.
둘, 청탁한 사람과 청탁받은 사람 모두 범죄가 성립해야 하는 공범 관계가 아닙니다.
두 번째 문제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
우선, 직권남용죄는 무엇일까요?
그냥 “직권남용죄”라고 부르기도 하고, “직권남용에 의한 권리행사방해죄”라고도 합니다.
형법
제123조(직권남용)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 조문, 분명 한국어인데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지요? 사실 법률가들도 그렇습니다.
직권남용죄는 좀 복잡합니다. 사실 관계를 들어도 그 죄가 성립할지 말지 얼른 감이 안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독 추상적인 표현이 많이 쓰인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법 규정이 모든 경우의 수를 나열하듯이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직권남용죄는 더더욱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죄이기는 합니다.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이라는 절도죄 규정처럼 덜 추상적인 단어가 쓰인 규정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좀 쉽지요.
이런 경우 중요해지는 것이, 법원의 역할입니다.
불명확하고 추상적인 법 규정이 법원의 해석에 의해 보충됩니다.
그럼 법원의 해석이 무엇일까요? 대법원 판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직권남용죄에 관한 대법원 판례를 봅시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서의 ‘직권의 남용’이란 공무원이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불법하게 행사하는 것, 즉 형식적, 외형적으로는 직무집행으로 보이나 그 실질은 정당한 권한 이외의 행위를 하는 경우를 의미하고, 남용에 해당하는 가의 판단 기준은 구체적인 공무원의 직무행위가 그 목적, 그것이 행하여진 상황에서 볼 때의 필요성•상당성 여부, 직권행사가 허용되는 법령상의 요건을 충족했는지 등의 제반 요소를 고려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대법원 2011. 2. 10. 2010도13766 판결)
법원은 우선 “직권”, 즉 “일반적 직무권한”이 있었는지부터 봅니다.
직권이 있다면 다음 단계로 그 직권이 “남용”되었는지 살펴봅니다.
"직권"이 있었는지 판단하는 때에 중요한 것은, 대법원은 공무원의 “직권”과 “지위”를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지위”를 행사한 것은 “직권” 행사로 보지 않습니다.
공무원이 그 직무에 관해 권한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그 직무와 무관한 지위나 신분에 기한 영향력을 이용한 경우,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대법원 판례입니다.
최경환 전 의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판시했어요.
인턴을 채용시키도록 한 행위는 국회의원의 지위나 신분을 이용한 불법행위로 볼 수 있을 뿐, 국회의원의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회법, 국정감사법 등을 보아도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관 기관(중소기업진흥공단)에 특정인의 채용을 요구하는 행위가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회의원의 직무 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
최 전 의원과 박 전 이사장 사이의 평소 관계, 최 전 의원의 평상시 말투와 박 전 이사장의 사원 채용 성향을 봤을 때 최 전 의원이 상대방의 의사결정 자유와 실행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강요죄도 불성립)
대법원은 직무관련성이라는 한계를 두어
“직권”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직권"은 공무원이 가진 "직무상 권한"이고, 직무상 권한은 공무원이라는 “지위(직위”에 근거해서 부여되는 것입니다. 지위가 없으면 직권도 없습니다. 공무원의 직권은 당연히 지위나 직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도 없고,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 말이지요. 우리가 대법원 판결에 화가 나는 것이 이 때문이지요.
지위든 직권이든 법령상 한계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위를 행사했건 직권을 행사했건 법령상 한계를 넘어서서 또는 자신의 지위나 직권과 관련성 없는 분야에 했다면 남용죄가 성립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이러한 범죄를 둔 것은 공무원의 직무상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최경환 전 의원 사건에서 검찰도 기소 당시부터 기존 대법원 판례대로라면 무죄가 선고될 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법리가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물론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으나), 혹시나 대법원 판례가 변경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1심, 2심 모두 무죄가 나도 대법원까지 상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는 수십 년간 직권남용죄에 관한 이와 같은 해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형법 조문이 “직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원은 “지위”를 포함하여 해석하면, 조문에 ㅈ거힌 “직권”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해석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원은 법률 조문의 문언적 의미를 넘어서서 해석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거든요.
그렇다면 국회의원들이 형법 규정을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태 이 규정에 대한 개정 시도가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싶지 않지만, 영향력이 큰 고위 직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을 옭아매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 개정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사건에서 법원이 최경환 전 의원을 특별히 봐준 것은 아니랍니다.)
저는 20년이 넘도록 알고 지낸 법이, 어떤 때는 '참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다.' '어떻게 구석구석 빠짐없이 논리를 갖추어 두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직권남용의 법리에 관해서는 동의하기가 힘드네요. 법을 만들 때나 적용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요? 사회일반인들의 인식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