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지행동치료 노트]
어린 날 억압받거나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서 그로 인한 다양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 내 경험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내 삶에 꽤 영향을 미치고 있고, 내 삶을 잘 만들어가기 위해서 그 기억을 잘 관리해나가야 한다는 것.
어린 시절을 벗어났다는 것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성인의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성인의 나이가 지나고도 몇 년간은 시험공부로 어린 시절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여전히 부모님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야 했고, 정신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했었다. 누군가 타인에 의해 내 생존이 영향을 받는 상황은 완벽한 자유를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십 대 중반에 공부를 하러 처음 부모 곁을 떠났다. 20만 원짜리 고시원 같은 원룸에 누워, 처음 자유를 느꼈다. 거실도 부엌도 없는 작고 답답한 그 조그마한 방에서 처음 자유를 느꼈다 말하려니 어색하고 우습다. 내 인생에 그 어떤 잡음도 만들어낼 수 없는, 완벽한 내 선택으로 이루어진 공간. 그 공간의 냄새, 온도, 조도.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 그 관짝같던 단칸방에서의 자유로움을 지금은 조금 더 큰 방, 조금 더 큰 집에서 누리고 있다. 혼자 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결해나가는 나만의 삶. 나는 점점 건강해져 갔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갔다. 그리고 많은 문제들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나의 정신적인 독립은 가속화되어갔다.
“돈 달라 소리 할 필요 없으니까
부모한테 전화도 안 한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전화를 받으면 저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해서 좋은 점이 많았지만, 엄마에게 돈 달라고 할 필요 없는 바로 그 지점이 나는 특히 좋았다.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무능하고 무기력했고, 엄마는 불쌍했다. 어린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엄마는 가엾어해야 했다. 그리고 늘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엄마의 저 말이, 애써 모른 척 했던 엄마에 대한 부채감을 불시에 깊숙이 찔렸다. 하지만 그래도 모른척 했다. 엄마에 대해서도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돈으로 해결했다. 부모님의 존재가 내 삶에서 멀어질수록, 가족의 존재로부터 멀어질수록, 나는 안정을 찾아갔고, 내 인생은 자유와 성공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성공하고, 행복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해온 엄마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조차도 내 인생에서 멀어져 주면
내 행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엄마도 내 행복을 바라잖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른이 된 나는,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이루고 내 삶을 꽤 잘 꾸려가고 있었다. 2년 전쯤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하게 됐다. 그때 내 부모와 나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경험했다. 부모님은 영어를 못했고, 해외에서는 모든 걸 나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서는 어린 시절의 나와 부모님 관계가 뒤바뀌어 있었다. 부모님과 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이해할지 모르겠다. 나도 처음인데, 질문을 쏟아내신다. 꼭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닐지라도 길 찾기도 바빠 죽겠는데 질문까지 쏟아내면 사실 짜증이 나지만 꾹 참는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가 그랬듯, 어딜 가든 엄마 손은 꼭 잡고 다녔다. 엄마의 보호자였다. 아빠랑은 손을 잡아 본 적이 없고 잡을 생각도 해본 적 없다. 아빠는 엄마와 내 옆에서 혹운 뒤에서 우리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그랜드 캐년 서클을 돌고, 샌프란시스코로 가기 위해 라스베이거스 공항으로 왔던 순간이다. 사람이 무척 많았다. 공항 자체도 사람이 많았고, 우리 탑승구 근처에 식당이 몇 개 있어 더 사람이 많았다. 엄마 손을 꼭 잡고 탑승구를 찾아가다 잠깐 사이 아빠가 우리를 놓쳤다. 나도 길을 찾느라 우왕좌왕,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엄마야 내 손을 꼭 잡고 나와 한 몸처럼 있었지만, 아빠는 뭔가를 쳐다보다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아빠를 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잠깐 망설였다.
아빠를 부를까, 말까.
내가 부르지 않으면
저 길로 가다가 아마 우리를 놓치겠지.
왜 아빠가 우리를 놓쳤으면 했을까. 왜 아빠를 불러 세울까, 말까 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을까. 그 상황에서 답은 너무 당연하게 아빠를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는데… 찰나였지만 진심으로 망설였던 그 순간. 순간이었지만 나는 강렬하게 번민했다. 그 여행 동안에는 아빠는 오히려 어린아이였고, 나는 어른이자 아빠의 보호자였다. 내가 가진 권력, 그 순간 아빠에게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력. 나는 마구 휘두르고 싶었다. 그것도 아빠가 가장 취약한 순간에…
그런 악랄한 마음을 먹은 내가 사람인가 싶었다. 만일 후자의 선택을 했다면, 아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너무 패륜이 아닌가.
나는 왜,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나는 정말, 후자의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까? 한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배울만큼 배웠고, 타인에게 불친절하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낯선 사람이라도 한국인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면 도와주는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어린 괴물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오히려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되갚아줄 기회만. 어린 시절의 불안과 원망을 갚아줄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순간을 위해 칼을 갈며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내 어린 괴물은 슬프고, 외롭고, 아프지만, 상처 준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은 적이 없었고, 그래서 화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과는 영원히 받을 수 없다.
아빠는 나에게 상처를 준 기억이 없고, 내 어린 괴물의 슬프고, 외롭고, 아픈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다행이지 않은가. 아빠는 술을 마셔도 물건을 부수거나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끔은 무섭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리고 사과를 받아서 뭘 할까. 이제와서 그딴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내가 그나마 아빠에게 물려 받은 머리와 나쁘지 않은 외모를 활용해서 유리하게 살아가면 충분하지 않은가. 내가 어마어마하게 잘 살았다면, 과거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마어마하게 행복하게 살았다면, 과거에 대한 그런 사과에 집착이나 했을까. 지금 내 인생이 덜 마음에 드는 이유를 아빠에 대한 원망에서 찾는 것은 아닐까. 그럴 시간에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사과에 대한 내 집착에 합리적 의심이 든다.
게다가 나는 과연 사과받을 자격이 있을까. 어른이 된 나는 충분히 그때의 아빠를 이해할 수 있다. 아빠도 젊었고, 돈벌이에 지쳤고, 자식들이 버거웠으리라. 자주 무능했지만,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때의 아빠보다 어마어마하게 잘 살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지금도 사과 따위에 집착을 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일일이 사과를 받을만큼 자식이었나. 나는 돌이켜보면 틈틈이, 꾸준히 아빠에게 복수해왔다.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의 그 날이 무척 강렬했지만, 그 전으로 돌아가도 소소한 복수, 아빠에 대한 무시, 저항 등은 늘 해왔다. 아빠에게 나도 대단히 좋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날, 그 공항 이후 나는
아빠의 불완전함을, 더 나아가
나의 불완전함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빠는 그렇게 사과할 만한 행동도, 나는 그렇게 사과받을 만한 행동도 한 게 없다. 그냥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었다. 나는 아빠와의 관계에서 내 행동의 매뉴얼을 정했다. 이 관계에서는 더 이상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매뉴얼대로 행동한다. 나는 아빠와의 이 정도 관계에 만족한다. 이제와서 대단히 아름다운 부모자식 관계까지 갈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티끌 하나 없이 원만하고 완전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아빠를 이 정도로 바라보고, 이 정도의 친절을 베풀 수 있게 된 데에 감사한다.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
딱 이 정도를 베푼다. 더 친절하기 위해 감정을 만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