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살 무렵 고시공부를 한다고 집을 떠났다.
서른아홉이 된 지금까지 세어보면 열 다섯 해를 엄마와 따로 살았다.
처음 집을 떠날 때는 앞으로의 내 삶이 어찔될 줄도 몰랐고, 이렇게 오래 엄마와 따로 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젊은 날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눈 앞의 공부에 관심을 두느라 5년 뒤, 10년 뒤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 음식이 내 입맛에 너무 짜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거제도 바닷가 사람이라 생선조림에다 생선탕을 자주 해주셨다.
오늘도 호박을 듬뿍 깔고 두툼한 갈치를 올린 갈치조림을 해주신다.
국물을 조금 떠먹는데, 너무 짜다.
엄마의 음식 간이 짜졌는지, 원래 이랬는데 내 입맛이 싱거워진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엄마는 아무렇지 않고 맛있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상대적인가 싶다.
엄마와 옷을 사러 간다. 오랜만에 집에 오면 엄마는 딸과 같이 백화점 가는 걸 좋아한다.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딸을 졸라서 새옷을 얻어 입는 것도 좋고, 딸한테 새옷을 사주는 것도 좋다고 하신다.
실리적인 인간인 나는 그게 뭐냐며, 엄마 돈으로 엄마 옷 사입고, 내 돈으로 내 옷 사입으면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 말이 그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런다.
사실 엄마랑 옷을 사러 가면 힘들다. 취향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취향이 안 맞으면 상대방 취향을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취향을 강요한다. 나는 싸우는 걸 싫어하는 성향이니 그냥 엄마 취향대로 사버린다. 그리고 그 옷은 옷장에 처박혀 있다가 아름다운 가게 기부 물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엄마와 쇼핑이 나에게 즐겁지는 않다.
쇼핑몰에서 나와 길을 건너려는데 신호등 초록불이 깜빡인다.
건너가자고 엄마 손을 잡아 끄는데, 엄마 몸이 더 이상 마음처럼 반응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낯설다. 한 번씩만 와서 2~3일만 있다 가는 자식이 뭘 알겠나.
그러고 엄마를 바라보니 역시 낯설다.
수북하던 머리숱이 다 어디로 가고, 어느새 정수리가 숭숭. 머리카락은 영양가 없이 풀풀 날린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기가 겁이 난다며 머뭇머뭇 손잡이를 꼭 붙잡으며 타는 엄마가, 너무 낯설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마치고 집에 오던 길에 저 멀리 엄마를 발견했다.
156cm 키에 45kg 정도로 날씬하고 날렵하던 몸매의 젊은 엄마다.
겨울이면 자주 입던 빨간 패딩 잠바에 새파란 청바지를 입고 머리숱은 빽빽하고, 찰랑찰랑 단정한 칼 단발을 한 젊디 젊은 우리 엄마가, 나를 향해 팔을 활짝 펴고 서 있다.
생각해보니 그 때 엄마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였다.
달려가서 엄마에게 안겼다.
엄마는 패딩잠바를 열어서 나를 품에 쏙 안고 빙그르르 돌아주기도 했다. 그 포근하고 따뜻한 품 속이란!
매일보는 엄마인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엄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엄마가 마음껏 뛰고 나를 힘껏 안아올리던 시절.
내가 수 년간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고, 그런 만큼 엄마에게 세월은 서서히 왔을 것이다.
이제와 보니 나는 엄마의 세월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엄마에게 세월이 쌓이는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