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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Aug 15. 2020

결혼해라, 또 잔소리.

사실 우리 엄마는 다른 집 엄마들보단 결혼해라 잔소리를 늦게 시작하셨다.


고시 공부로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엄마 당신의 결혼 생활이 그리 순탄치 않았기에 딸인 나에게는 결혼을 해라 마라, 별로 말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던 내 나이 서른 다섯쯤.

내가 유학 다녀 오자, 서른 다섯이라는 내 나이를 제대로 인지하게 되면서 다른 엄마들같은 결혼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자식이라도 나이를 세고 있지는 않는 모양이다.

내 나이를 진심으로 깨닫고 깜짝 놀라던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그 때까지도 그 소리가 너무 잔소리같았다. 결혼에 ‘결’자만 꺼내도 짜증을 부리며 엄마를 구박했다.

별로 결혼 할 생각 없다는데 왜 저렇게 강요하는지.

사실 엄마는 별로 강하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신 말도 못 꺼내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다 내가 서른여덟살되던 해에는 정말 엄마의 관심이 폭발했다.

종종 결혼의 좋은 점을 어필하고 적극적으로 내 남편감을 물색하기도 했다.

아이는 내가 키우기 힘드니 딱 하나만 낳고 낳으면 엄마가 길러 줄거고, 남편의 성품은 따뜻하고 나랑 비슷한 일은 하는 사람이고, 내 직장생활을 잘 도와줄 것이고...


엄마의 꿈은 엄청 구체적이었다. 


내 결혼의 단꿈을 엄마가 대신 꿔준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건 그저 엄마의 단꿈이었을까.

엄마가 누리지 못했던 결혼을 행복을 딸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른여덟살 되던 해에 육십다섯살의 엄마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 때 알았다. 내가 엄마의 마지막 걱정임을. 엄마는 초기 대장암이었지만, 초기라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다소 불안해했다. 엄마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려 놓지 못하는 게 자식의 행복이라는 것. 자신이 위태로울 때 혼자 남을 자식을 걱정하는 것. 


물론 이후에도 나는 엄마의 노력에 딱히 부흥하지 못했고, 여전히 그럴 마음이 들지도 않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 소리에 짜증을 내지 않는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아주지 못해 오히려 약간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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