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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May 10. 2021

이혼하지 않은 이유(상담 3)

이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 많았다.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적어도 나는 조건으로 따지면 이혼할 수 있는 모든  필요충분조건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내 명의로 된 전세(곧 구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집), 완벽한 직장(은행), 젊은 나이(만 30세), 그리고 맞벌이를 하며 모아 두었던 적당한 정도의 저축액.

겉으로 보기엔 이혼을 망설일 만한 티끌만큼의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남편의 동의 아래 전세 명의와 모든 예금의 명의를 내 이름으로 모두 바꾸면서 심지어는 이혼 서류와 양육권 포기 각서까지 모두 작성해 놓은 상태였었다.

유책 배우자였던 남편은 자신의 잘못은 깔끔하게 인정했고 무엇이든 내 처분만 기다리겠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상태였다.

혹여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이의 양육비는 물론이고 교육비와 결혼자금까지 다 책임지겠다고 자발적으로 각서까지 작성했었고(물론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걸  알고 었지만 심리적 압박감을 주기 위해서 도록 했었습니다.) 사실 그 상황에 돈 걱정 따위는 들지도 않았었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보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 그 약속을 지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설령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지키지 않는다 해도 남편의 돈 없이도 얼마든지 풍족하게 기를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되지도 않았다.(하긴 자식이 그렇게 끔찍하도록 이쁜 사람이 딴짓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네요. 약한 몸으로 아이를 기르던 3년의 육아 휴직을 제외하곤 한 번도 맞벌이를 멈춰본 적이 없는 아내를 모른 척하고 말이죠)


그런데 이제 내가 도장을 찍고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러 가기만 하면 되는 그때 그 순간에 들끓던 마음이 잠시 담담 해지 내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혼이 하루라도 늦춰지기만 바라던 남편은


"여보. 당신이 하자는 데로 다 할 테니까 천천히 차분하게 생각해 봐. 날 용서하고 기회를 달라는 것만은 아니야. 도장 찍고 일을 벌이고 나면 수습하기 곤란해지니까 차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한 후에도 마음 변함이 없으면 그때도 당연히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 내가 죄인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그 도 기회를 잡고자 나불 거리는 주둥이에 주날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 했습니다. 아효!!)

"시끄러워. 조용히 해.  당신하고 더 이상 문젯거리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입 다물어. 그리고 내가 결정할 때까지 내 앞에서 알지랑 거리지 마. 당신 좋아하는 술 마시러 가던가. 골프 치던가. 본가로 가 있던가. 내 눈에 띄지 마. 결정하면 통보할게. 지금은 내 눈에 띄지 마."




옆에서 나불거리며 본인이 저지른 잘못 대가가 앞으로 살아 가는데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키 될지 짐작도 못한 체  주위를 맴돌던 남편은 몇 날 며칠을 죽을 것 같던 심정으로 버티던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난 후에야 조용히 집을 나섰다.

더 이상 말을 붙여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마음 같아선 생각이고 뭐고 가진걸 모두 빼앗고 알거지, 알몸으로 만들어 내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차피 신혼집 장만도 반반, 혼수는 내가 다했고 그나마 저축도 내가 아니었음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일이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만 생각하면 큰 소리로 엉엉 울며 저 인간이 저지른 말 같지도 않은 짓과 내 마음의 이 괴로움을 누군가에게라도 당장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곤 석 달 열흘이고 곡기를 끊고 분한 마음에 울며 발광이라도 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작성된 이혼 서류 접수하고 다시는 남편의 낯짝을 안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고 냉정해져 갔다.

맨 처음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도움을 받았던 언니도 내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자 궁금해 하긴 했지만 조용히 기다리는 듯했다.

남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고를 쳤을 때가  아이가 만 3살이 되던 해였다.

나도 이제 결혼 한지 햇수로 5년, 이제 막 서른이 된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그때 내가 이혼을 선택한다는 건 나만의 이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발목을 잡았던 것이었다.




우리가 신혼 생활을 시작하고 내내 살던 동네는

친정아버지가 처음 아파트에 당첨되어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이사를  어릴 적부터 자라고 결혼을 하고 내 아이까지 낳아 31년 가까이 살아온 곳이었다.

집 가까운 지점에 다닐 땐 일하는 도중에 오신 손님이 나를 보며


"나루야. 오늘 아침에 출근하는 거 봤는데 입고 가던 원피스 예쁘더라. 어쩜 넌 애까지 있는 애가 처녀 같니.., 호호호"


라며 인사를 할 정도로 친정 가족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동네였다.

어딜 가나 어디서나 항상 몸가짐, 마음가짐, 말조심을 해야 할 만큼 보는 눈도 많고 소문도 빠른 동네였다.

우리 집의 개혼(開婚)이었던 내가 이혼을 한다는 건  개인인 나 '나루 이혼'이 아니라  ' ○○댁 첫째 딸의 이혼'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아버지와 같은 직장을 다녔었다.

물론 직장에서 아버지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을 만큼 전혀 상관없이 일을 했지만 내게 아버진 항상 큰 숙제고 짐이었다.

예컨대 어떤 설루션을 진행했을 때 내가 그것을 남들보다 잘 해내면 그건  ' ○○ 의 딸 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고 남들과 비슷한 결과를 내면 ' ○○의 딸이라서 기대했는데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네' 란 소리를 늘 들어야 했다.

항상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며 살아야 했었다. 본점에서 주는 상을 받아도 지점 에선 항상 내게 '아버님 생각해서 주는 것'이라는 공치사를 곁들이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런 정글 같은 곳에서 내가 이혼을 한다면 그건 그냥 나의 이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 딸의 이혼'이 될 것이고 안 그래도 보수적인 것의 끝판왕인 은행에서 그건 치명적인 꼬리표가 됐을 것이다.


나는 나였지만 나 혼자가 아니었다.

실망하시고 노여워하실(물론 남편에게. 아마 아버지가 그때 이 사실을 아셨다면 이혼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남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지 않으셨을까 가끔 생각했었어요.) 부모님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어떤 게 좋은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차피 결정은 내가 해야 됐겠지만 누구에게든 의논하고 조언을 구할 곳이 없었다. 모든 판단은 내 몫이었고 난 서툴고 외로웠다.


지금은 아픈 나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왜 그때 이혼하지 않았느냐고 말하지만 만약 그 당시에 내가 이혼했다면 아이는 사춘기를 겪는 때 그 순간에 왜 결혼도 마음대로, 이혼도 마음대로 했냐고 원망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이가 상담을 다녀온 후 아이를 불러 물어보았다.


"지니야. 엄마랑 아빠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건 인정해. 그런데 그 대신에 엄마가 할아버지, 삼촌, 이모네 가까이 살면서 아빠까지 주일에 자주 만나고 다 화목하게 지내잖아. 특별히 아빠가 큰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아빠랑 이혼했다면 지금쯤 넌 아빠가 없던지, 새아빠랑 살던지 그랬겠지. 이혼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야. 쉬운 일도 아니고. 지금은 네가 힘드니까 원망할 대상을 아빠로 잡아서 그렇지 만약 엄마가 맘대로 이혼했으면 왜 맘대로 이혼했냐고 난리 쳤을걸?

화가 난 걸 한 번에 다 풀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조금씩 생각을 다르게 해 보려고 노력해 봐.

너랑 아빠랑 자꾸 싸우면 돌아가신 할머니  속상하셔. 알겠지?"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딸은 눈물을 '후두득' 떨구며 눈물 젖은 목소리로 철이 든 듯 말을 했다.


"엄마가 아픈데 맨날 늦고 엄마 속상하게 하는 아빠가 미워. 사실 상담하면서 아빠 얘기 전해 들으면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천천히 마음 가는 데로 할래.

그리고 엄마가 한 말이 맞아. 이혼했음 왜 했냐고 난리 쳤을 거야.

엄마. 아프지 마.... 잘 들을게."


나는 그저 나 한 사람만 참고 남편을 용서하고 살려고 노력하면 될 거라 믿었다. 남편도 내 맘을 알아 줄거라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아물거라 믿었다. 상담이 우리에게 큰 전환점이 될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오지게 착각한 거였다.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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