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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Sep 18. 2021

지옥문이 열렸다.

이스방과의 악연.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이사를 와서 허허벌판이던 곳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만 덜렁 서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40년간을 살던 동네였으니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유년의 기억들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사를 해야 할 만한 불가피한 상황과 합당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돌아올 테지만 그때는 지금과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 그래도 불면증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이사를 앞둔 그날 밤은 수면제를 먹었음에도 단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속에 서늘한 기분이 스치듯 지나갔다. 대낮에 깨어있는 시간이었다면 아마 느끼지 못했을 찰나의 느낌이었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느낌이 들도록 허술하게 주변을 정리하지 못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낯선 느낌이기도 한 데다 여러 가지 약과 통증에 지쳐 이미 지난 1년간의 시간을 기억에서 잃어버린 나였기에 아무리 정신을 모아보려 해도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는 없었지만 그 밤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이사가 끝나기 만을 바랐다. 새로 이사 가는 곳에 잘 적응하고 병세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비켜가는 법이 없는 걸까?


결국엔 남편이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내가 그렇게 몇 번이고 확인하고 알아보고 맞춰놓으라고 했던 잔금을 남편은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날 밤에 무언가를 놓친 건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이 내가 저지른 단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였.

도대체 언제까지 모든 걸 내가 일일이 확인하고 처리를 해야만 던 걸까.

그때 이미 난 희귀 난치 질환을 두 가지 다 선고받고 혈관성 두통과 섬유 근육 통증까지 난치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사하기 일주일 전 까지도 자율신경 실조증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상태였다.

난 아프기만도 벅차고 힘이 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남편의 어리광과 철없음을 받아주고 해결해줘야 하는 건지 참을 수가 없도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나는 것을 떠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건 나중의 문제였다. 그 당시엔 잔금이 부족하다는 딸의 전화를 받자마자 그대로 혼이 나가버릴 것 같은 마음 정신 차려 붙들어야만 했다. 우선 남편과 내 통장에 남아 있는 잔돈을 긁어모아보니 200만 원 정도가 되는 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돈은 없었다. 이미 이사 준비를 하면서 평수를 넓혀 가느라 새로운 가전과 가구를 장만하는데 많은 돈을 쓴 상태였고(그때까지 아껴 쓴다고 결혼할 때 장만했던 가구를 그냥 쓰고 살았었어요) 아무리 빠르게 돈을 만든다 해도 3일 이상은 시간이 필요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친분이 있는 분들에게도 급하게 연락을 했지만 60도 아니고 600도 아니고 당장 6,000만 원을 현금으로 선뜻 빌려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 뻔했지만 이제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친정아버지에게 말씀드리는 일이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부족하지 않게 도와주셨지만 한 번도 내가 먼저 아버지께 손을 벌린 적은 없었다.

게다가 사는 곳을 옮기는 중요한 일에 그것도 당일에 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한다면 어떤 불벼락이 떨어질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더 날 망설이게 하고 자책하게 만든 이유는 벌써 몇 달 전에 제일 먼저 이사를 나가는 우리들에게 돈 걱정을 하지 말라며 아버지께서 큰돈을 주셨다는 사실이었다.

수십 번을 확인하던 내게 남편이 일주일 전에 만이라도 얘기했다면 내 인생을 뒤엎어 버리는 지옥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 거란 얘기다.




친정에서 점심을 먹기도 전에 딸의 전화를 받고 무슨 정신으로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었는지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는다.

식사 후에 난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크게 화를 내지 않으셨다.

물론 전혀 화를 안 내신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셨다. 한 번도 부모님 앞에서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입원을 자주 했었어도 엄마만 한번 다녀가실 뿐 언제나 병실엔 나와 딸 뿐이었다. 오히려 친구들, 지인분들, 교회분들이 아픈 나를 많이 이해해 주고 곁에서 도움을 주었었다. 난 내가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불효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떻게 일을 이따위로 해?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사는 거야? 1~200도 아닌고 몇 천이 당일날 없다고 하면? 말이 ! 성질 같으면 길바닥에 나 앉든 말든 모른 척하고 싶은데 나루 네가 아프니까 해주는 거야. 그것도 지난번 너네 돈 보내주고 남은 게 있으니까 다행이지. 다 묶여 있어서 찾을래도 3~4일은 걸리는데 어쩔 뻔했어. 이걸로 큰돈 주는 건 끝이야. 알겠어?"


손녀딸인 지니를 불러 은행에 함께 동행해 돈을 찾아 잔금을 치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는 사이 난 친정 집에 누워 여지없이 찾아온 CRPS통증에 숨죽여 울부짖으며 몸부림쳐야 했다.


그런 모든 일들을 해결하는데 이스방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리곤 이사 짐이 대충 정리된 10시쯤에 딸이 나를 데리러 친정으로 돌아왔고 집으로 돌아갈 때 아버진 무겁게 입을 떼셨다.


"그 돈 그냥 내가 내주는 거니까 이사 정리 잘하고 당분간 집에 연락하지 말고 니 몸조리나 잘해라."

"아버지. 죄송해요. 돈 정리해서 빨리 보내 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됐다고. 돈 보내지 . 니 몸조리나 잘하라고. 얼른 가라."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천근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햇수로 3년간 친정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스방이 내게서 가족들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가족들은 나를 버렸다. 내가 가장 아프고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게 지옥문이 열리고 말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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